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영숙(永叔), 호는 근재(近齋). 공주판관 박사석(朴師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책을 읽으면 한 번에 수십 줄씩 읽었다. 김원행(金元行)과 김지행(金砥行)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깊이 연구해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받았다.
179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98년 원자(元子)를 위하여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서연관(書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집이 가난해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특히 박윤원은 당시 소개되던 서학(西學)의 폐해가 도교나 불교보다도 크다고 하여 배척하고, 오직 경전의 훈고와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이재(李縡)·김원행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으로, 다시 문하의 홍직필(洪直弼)에게 전수해 신응조(申應朝)·임헌회(任憲晦)·조병덕(趙秉德)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동문의 오윤상(吳允常) 등과는 많은 학문적 논란과 교류가 있었다. 박윤원은 성리설에 대한 체계적인 장편의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의(經義)와 잡저에 부분적으로 반영된 박윤원의 생각을 종합하면, 대개 절충적 입장에서 학설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설(心說)에서 심(心)은 기(氣)라고 하였다. 『대학』 장구의 허령불매조(虛靈不昧條)의 경의에 대한 해석에서 박윤원은 허령의 기가 심이 된다고 하여 심시기(心是氣)의 주기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이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理在氣先).’고 생각해 주리적 경향을 보였다.
또한 예학에 관해서도 깊은 연구와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홍직필을 비롯, 이재의(李載毅)·정도일(丁道一)·어석중(魚錫中) 등 다수가 있다. 죽은 뒤에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근재집(近齋集)』과 『근재예설(近齋禮說)』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