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

고사촬요 / 유서
고사촬요 / 유서
출판
개념
내용을 사항별로 분류, 편집한 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유서는 내용을 사항별로 분류, 편집한 책이다.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진 동양 고유의 서적편찬 형식으로 일종의 백과사전과 같다. 동양의 경·사·자·집의 전 영역 또는 일정 영역에 걸친 많은 서적으로부터 고실·시문 등의 사항을 유별 또는 자별로 분류, 편찬하여 검색하기에 편리하게 만든 서적이다. 우리나라의 현존 최고의 유서는 1554년(명종 9)에 편찬된 『고사촬요』로 추정된다. 유서는 전고의 출처를 밝히고, 고사의 변천을 고구하며, 고서의 유문을 집일할 뿐만 아니라, 전본의 오류를 교감할 때 반드시 필요한 서적이다.

정의
내용을 사항별로 분류, 편집한 책.
개설

일찍이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에 전해진 동양 고유의 서적편찬 형식으로서 일종의 백과사전과 같은 것이다. 이는 동양의 경(經) · 사(史) · 자(子) · 집(集)의 전 영역 또는 일정 영역에 걸친 많은 서적으로부터 고실(故實) · 시문(詩文) 등의 사항을 유별(類別) 또는 자별(字別)로 분류, 편찬하여 검색하기에 편리하게 만든 서적이다.

유별로 분류한 유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 유(類)를 모두 수록한 유서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특정한 유만을 수록한 유서이다. 자별로 분류한 유서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구의 끝자의 운(韻)에 의하여 배열한 유서이며, 다른 하나는 어구의 첫자의 운에 의하여 배열한 유서이다.

이와 같이 유서는 많은 서적으로부터 사항을 뽑아 유별 또는 자별로 분류, 편집한 것이므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분류체재의 내용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즉, 유별로 분류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유문(類門)을 설정하였고, 찾고자 하는 사항이 어느 유문에 속하는가를 알아야만 쉽게 찾을 수 있다. 또 자별로 분류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찾고자 하는 글자가 어느 운에 속하며, 또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해야만 쉽게 찾을 수 있다.

유서의 정의를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백과사전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서는 일서(佚書)의 내용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므로 고서의 진위(眞僞)를 교감(校勘)하고 시부(詩賦)의 사조(辭藻)를 검색하며, 전고(典故)의 출처를 밝히는 것이 주목적인 데 비해, 백과사전은 어떤 특정한 학문이나 사실에 대하여 체계적인 설명을 가함으로써 그에 대한 완전한 개념을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며 전고의 출처를 조사하는 기능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구비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유서와 백과사전의 내용은 다같이 각 분야를 두루 망라한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자료의 수집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즉, 유서는 전인(前人)의 저술내용을 뽑아 편찬함으로써 편찬자는 단지 원문의 순서에 따라 이를 기록할 뿐 자신의 견해는 보통 첨가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백과사전은 어떤 특정한 학문 분야나 각 조목에 대하여 다 같이 전문가의 체계적인 설명을 통하여 과거의 사실과 현대의 새로운 지식을 아울러 제공하는 구실을 한다.

셋째, 내용의 배열방법에 있어 유서는 유별로 배열하거나 자별로 배열하는 데 비하여 백과사전은 자모순 또는 어휘순으로 배열한다.

넷째, 유서는 극히 일부분만이 권수(卷首)에 참고서목을 열거한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참고서목을 수록하지 않으며, 수록하는 경우에도 서명(편명) 또는 저자명만을 열거함에 그친다. 백과사전은 매항목 끝에 저자의 성명과 참고서목을 밝히고 있는 것이 많으며, 참고서목에는 출판사항을 명기하고 있다.

다섯째, 유서에는 색인이 없으며, 혹 갖춘 것은 대부분 뒷사람에 의하여 편집, 추가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백과사전은 대개 색인을 마련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동양 고유의 서적편찬형식이며 일종의 백과사전이라 할 유서는 서양의 근대 산물인 백과사전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

유서라는 명칭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헌상으로는 송나라 인종(仁宗) 때 편찬된 두 서목 『숭문총목(崇文總目)』과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의 병부(丙部)에 유서류를 분류법상의 일문(一門)으로 독립 설정하고 해당하는 서적명을 열거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 두 서목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편찬되었는가는 확정하기 어려우나, 다만 『숭문총목』은 송나라 인종이 그 서명을 지어 내려 준 해가 1041년(정종 7)이고, 『신당서』는 편찬 후 표문(表文)을 올린 해가 1060년(문종 14)이라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숭문총목』이 『신당서』 예문지보다 약 20년 가량 앞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유서라는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적어도 1041년보다 이전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되는 『숭문총목』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유서가 서목에서 분류법상 독립적인 유문으로 채택, 분류되기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진(晉)초의 순욱(荀勗)이 편찬한 서목 『중경신부(中經新簿)』에서는 유서인 『황람(皇覽)』을 사부(史部)에 해당하는 병부로 분류하였으며,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서는 자부(子部) 잡가류(雜家類)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구당서(舊唐書)』 경적지에 이르러 유사류(類事類)로 독립 설정되고, 『황람』 등이 잡가류에서 분리되어 별개의 유문으로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숭문총목』과 『신당서』 예문지에서 유사류를 유서류로 개칭한 이후 역대 서목은 모두 유서 유문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문헌상으로 유서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송나라 인종 때 작성된 두 서목 『숭문총목』과 『신당서』 예문지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실제 유서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소급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청나라 왕중(汪中)은 「여씨춘추서(呂氏春秋序)」에서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여불위(呂不韋)가 그의 문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들은 바를 저록(著錄)하여 천지만물 고금지사를 참고함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한 사람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진대 어찌 일가(一家)의 학문에 밝지 않겠는가. 후세의 『수문어람(修文御覽)』이나 『화림편략(華林遍略)』의 기초가 되었다.”라고 한 내용으로, 『여씨춘추』를 후세 유서의 기원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송나라 황진(黃震)이 『황씨일초(黃氏日鈔)』에서 “『회남홍렬(淮南鴻烈)』은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천하의 방술사(方術士)와 제자(諸子)를 모아 널리 이문(異聞)을 수집한 것으로, 무릇 음양(陰陽) · 조화(造化) · 천문(天文) · 지리(地理) · 사이백만(四夷百蠻) · 곤충초목(昆蟲草木) · 괴기궤이(瑰奇詭異) 등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것들을 모두 나열한 천하 유서의 기본이다.”라고 한 것을 이용하여 『회남홍렬』, 즉 『회남자(淮南子)』를 유서의 기본이라고도 하고 있다.

청나라의 유수옥(鈕樹玉)은 그의 『비석선생문집(匪石先生文集)』 중 「논회남자(論淮南子)」에서 “유서의 시초는 『회남자』로부터 비롯된다. 고인(古人)의 저서는 모두 자신의 학설을 모은 것으로서 뭇사람의 학설을 수집, 분류한 것은 없었는데 진(秦)의 여불위가 비로소 문장에 능한 문객들의 견문을 모아 『여람(呂覽)』을 저술함으로써 그 학설은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또 다른 서적에는 없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갓 섭렵만 한 것은 아니다. 『회남자』에 이르러서 뭇사람의 학설을 두루 모아 부류별(部類別)로 분류하였다.”라며 『회남자』를 유서의 시초로 보고 있다.

또,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이 『옥해(玉海)』에서 설명한 “유사의 서적은 『황람』에서 비롯하였다.”라고 한 것으로서 『황람』을 유서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근세의 중국 학자 우대성(于大成)은 유서를 정의하여, ① 각 유의 사물을 휘집(彙集)하고, ② 분류, 배열하고, ③ 많은 서적으로부터 사항을 뽑아 모아 책으로 엮어서 검색하기에 편리하게 만든 서적이라고 전제한 다음, 유서의 기원에 대해서도 이 세 방면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즉, 각 유의 사물을 휘집하였다는 점에서는 『시경(詩經)』을 분류, 배열한 서적으로서는 『이아(爾雅)』를, 고서 중의 사항을 필요에 따라 뽑아 엮은 책으로는 『탁씨미(鐸氏微)』를 각기 그 기원으로 들었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 작업을 한 데 합친 서적으로는 『회남자』가 최초의 것이기는 하나, 『회남자』는 결국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주로 논술한 자서(子書)이지 유서라고는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진정한 의미의 유서는 『황람』이 첫째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와 같이 유서의 기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그러나 유서란 많은 서적으로부터 사항을 뽑아 모아 유별로 분류, 배열하여 참고하는 데 편리하게 만든 서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서는 『황람』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역사

유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유서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편찬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유서의 역사를 고찰하려면 먼저 중국 유서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 유서는 처음부터 시문(詩文)을 참고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 뒤에 과거가 실시되고 관리의 등용시험에 시부(詩賦) 이외에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논문이 포함되었으므로, 초기의 유서가 시문 중심으로 편찬되었던 것에서부터 점차 제왕의 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군신(君臣)의 사적(事蹟), 국가의 문물제도를 알리는 것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서는 앞서 편찬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하여 칙명으로 관찬(官撰)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 내용이 점차 방대해졌다. 중국 최초의 유서인 『황람』은 위(魏) 220년(延康 1)에 문제(文帝)의 명령을 받아 왕상(王象) · 유복(繆卜) 등을 비롯한 여러 유신(儒臣)들이 경전(經傳)을 유별로 분류, 편찬한 것이다.

본서는 당대(唐代)에 이미 그 대부분이 없어졌으므로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뒤 남북조시대에 양(梁) 무제(武帝)의 명령을 받아 서면(徐勉)이 『화림편략(華林遍略)』을 편찬하였다. 북제(北齊) 때에는 조효징(祖孝徵) 등이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을 편찬하였으나, 이는 모두 없어져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당대에 편찬된 유서로 『구당서』 경적지와 『신당서』 예문지에 48부(部)의 서명이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북당서초(北堂書鈔)』 · 『예문유취(藝文類聚)』 · 『초학기(初學記)』 ·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등이 있다.

송대(宋代)에 들어오면서 유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분량이 1,000권을 헤아리게 되었다. 『송사(宋史)』 예문지에 수록된 유서명은 307부에 달하나, 이 가운데에서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 수록된 것은 단지 29부에 지나지 않는다. 송대의 유서 중 주요한 것으로는 『태평어람(太平御覽)』 · 『책부원구(冊府元龜)』 · 『옥해』 · 『군서고색(群書考索)』 등이 있다.

원대(元代)에는 운에 의하여 배열, 편찬된 것으로서 현존 최고(最古)의 유서인 『운부군옥(韻府群玉)』이 있다. 그리고 명대(明代))에는 유서의 규모와 수량이 앞 시대를 크게 능가하게 되었는데,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영락대전(永樂大典)』이다. 그러나 이 책은 편찬 후 간행되지 못하였으며, 지금은 그 대부분이 없어졌다. 이 밖에도 명대에 편찬된 유서로는 『당류함(唐類函)』 · 『천중기(天中記)』 · 『산당사고(山堂肆考)』 · 『금수만화곡(錦繡萬花谷)』 · 『잠확유서(潛確類書)』 등이 있다.

청대(淸代)는 유서의 전성기로서 그 수량이 명대를 훨씬 능가한다. 『사고전서총목』의 기록에 따르면, 명대의 유서는 139부가 있으며, 청대에는 비록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으나 청대에 편찬된 것과 명대의 것을 수보(修補)한 것을 합하여 대략 300여 부에 달한다. 청대에 편찬된 유서 중에서 특기할 것은 성조(聖祖) 때 편찬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으로서 이는 그 내용이 풍부한 중국 최대의 유서이다. 이 밖에도 규모가 비교적 큰 것으로는 『연감유함(淵鑑類凾)』 · 『패문운부(佩文韻府)』 · 『병자유편(騈字類編)』 · 『격치경원(格致鏡原)』 · 『분류자금(分類字錦)』 등이 있다.

우리 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많은 유서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정확하게 언제부터 어떤 유서가 편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에서 현존 최고의 유서는 1554년(명종 9)에 편찬된 『고사촬요(攷事撮要)』로 추정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와 중국의 유서가 특별히 다른 점은, 중국에서는 많은 유서가 제왕의 칙명을 받고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편찬한 관찬서적이지만 우리 나라의 유서는 거의 모두 한 사람의 힘으로 편찬된 사찬(私撰)서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중국에 비해 참고할 서적의 종류와 분량이 적기 때문에 분류, 편찬할 자료 또한 많지 않았던 까닭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의 유서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고사촬요』 이외에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지봉유설(芝峰類說)』 · 『성호사설(星湖僿說)』 ·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 『고사신서(攷事新書)』 · 『물명고(物名考)』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 ·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이 있다.

『고사촬요』는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것으로, 조선사회의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서리(胥吏) 및 일반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이르는 일반 상식을 수록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서적이었으므로 1554년 어숙권이 편찬한 이후 1771년(영조 47) 서명응(徐命膺)이 『고사신서』로 대폭 개정, 증보하기까지 무려 12차례에 걸쳐 속찬(續撰)과 개수(改修)를 거듭하면서 간행, 널리 반포하였다. 이들 『고사촬요』의 여러 간본은 각각 그 내용이 보태지거나 생략된 경우가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 간본은 내용에 많은 차이가 있다.

서명응이 개정, 증보한 『고사신서』는 전체 내용을 천도문(天道門) · 지리문 · 기년문(紀年門) · 전장문(典章門) · 의례문(儀禮門) · 행인문(行人門) · 문예문(文藝門) · 무비문(武備門) · 농포문(農圃門) · 목양문(牧養門) · 일용문(日用門) · 의약문(醫藥門)의 12부문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383항목으로 세분하여 각 항목마다 그에 해당하는 사항을 나열하였다. 편찬자 서명응이 주로 역점을 두고 증보 · 개정한 내용은 전장문(50항목) · 농포문(103항목) · 일용문(48항목) 및 의약문(96항목)의 4개 부문으로서, 이들 4개 부문에 나열된 항목이 전체 항목수의 77%를 웃도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선조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것이다. 이는 원나라의 음시부(陰時夫)가 편찬한 『운부군옥』의 체재를 모방하여 전체를 106운으로 나누고, 각 운에는 이에 해당하는 동운자(同韻字)를 열거하였다.

각 운자 아래에는 일정한 유목(類目)에 따라 끝에 동운(同韻)이 오는 2자 · 3자 · 4자 등으로 된 성어(成語)를 적고, 많은 고금의 서적으로부터 우리 나라의 문물제도 전반에 걸친 고사를 뽑아 수록하였다. 이 책은 자별(字別)로 분류한 유서, 즉 운자에 의하여 분류된 유서 중에서도 성어의 끝자운에 의하여 배열된 유서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 책을 편찬할 때 참고한 서적은 우리 나라 서적 174종, 중국 서적 15종, 도합 189종으로서, 여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것이 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의 서적 중에서 현존하지 않는 서적의 내용까지 수록하고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봉유설』은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하였는데, 전체 내용을 25부문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183항목으로 나눈 다음 각 항목을 3,435조목으로 다시 세분하여, 각 조목에 해당하는 고실(故實) 및 문견(聞見) 사실을 고금서적으로부터 뽑아 편찬한 것이다.

참고한 서적은 348종이며, 상고시대로부터 조선조 당시까지에 걸친 2,265명의 인명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고실 전반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긴요할 뿐만 아니라, 특히 그 경제적인 문장과 과학적인 서술로 말미암아 실학사상의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호사설』은 이익(李瀷)이 40세를 전후하여서부터 약 40년 동안 수시로 기록해 두었던 것을 팔순에 가까운 말년에 이르러 그의 족자(族子)가 베껴 써서 전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몇 가지의 이사본(異寫本)이 있으며 그 내용도 각각 차이가 있다.

하지만 1967년 경희출판사(慶熙出版社) 영인본을 대본으로 전체 내용을 보면, 천지문(天地門) · 만물문(萬物門) · 인사문(人事門) · 경사문(經史門) · 시문문(詩文門)의 5부문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3,057항목으로 세분하여 각 항목에 해당하는 사항을 배열하였다. 천지문에는 천문과 지리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만물문에는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하여 저자 자신이 평소에 상고(相考) · 변증(辨證)한 것들이 분류되지 않은 채 수록되어 있다.

또, 인사문에는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혼인과 제례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경사문에는 경(經) · 사(史)에 관한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수록하였다. 경사문 중에서 특히 역사에 관한 부분에서는 이익 자신의 사론(史論) 및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역사적 사실(史實)과 제도 · 인물 · 풍속 등에 관한 방대한 변증내용이, 시문문에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시와 문장에 대한 논의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성호사설유선』은 안정복(安鼎福)이 『성호사설』의 내용에 첨삭을 가하여 요약, 개편한 것이다. 이 책의 분류체재는 『성호사설』의 문(門)을 편(篇)으로 고치고, 각 편은 다시 문으로 세분하여 각 문을 또 항목으로 세분한 다음, 전체 내용을 5편 20문 1,396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에 상응하는 사항을 뽑아 수록하였다. 두 책의 동일 부문별 항목 수를 비교해 보면, 『성호사설유선』의 천지 · 인사 · 경사편은 각각 『성호사설』의 약 2분의 1, 만물편은 약 12분의 1, 시문편은 약 3분의 1 정도의 항목으로 요약, 개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명고』는 순조 때 유희(柳僖)가 지은 조수(鳥獸) · 초목(草木) · 금석(金石) · 수화(水火) 등에 관한 명록(名錄)이며, 박물서(博物書)이다. 이 책의 분류체재는 특이하여 전체 내용을 유정류(有情類) · 무정류(無情類) · 부동류(不動類) · 부정류(不靜類)의 4부류로 나누고, 이를 다시 14항목으로 세분하여 각 항목마다 이에 해당하는 물명(物名) · 형성(形性) 등의 사항을 나열하였다.

내용의 기술방법 또한 특색이 있어서 새 · 짐승 · 물고기 · 조개 · 벌레 등은 그 성질 · 빛깔 · 형태 · 산지(産地) 등을, 풀 · 나무는 그 성질 · 빛깔 · 크기 · 개화기 · 산지 · 용도 등을 밝혀놓았다. 또, 물명 기록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한자명 이외에 한글이름을 적어놓았으므로 국어학 연구에도 참고자료가 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정조조에서 철종조에 걸쳐 활약한 이규경(李圭景)이 많은 서적으로부터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기타 외국의 고금사물과 전고(典故)를 뽑아 고증하고 틀린 점을 정정하여 1,414항목으로 세분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수시로 기록한 탓인지 그 편차에 있어 미처 편자의 정리를 거치지 못한 듯 각종 사물이 부류별로 잘 배열되지 못한 것이 흠이나, 우리 나라의 전고를 참고함에 있어서는 특히 긴요한 서적이다.

『임하필기』는 1871년(고종 8)에 이유원(李裕元)이 편찬하였다. 많은 서적을 전거로 하여 사서오경 · 『소학』 · 금석(金石)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문물제도 및 전고 등 광범한 분야에 걸친 사항을 뽑아 편찬한 것으로, 전체 내용을 16편(編)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3,568항목으로 세분하여 수록하였다.

이 책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저술한 부분은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과 「춘명일사편(春明逸史編)」의 두 편으로서 그 분량은 각각 1,647항목과 840여 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 두 항목의 합계가 전체 항목수의 약 3분의 2를 상회하는 것을 보더라도 다룬 범위의 광범함과 내용의 풍부함을 짐작할 수 있다.

「문헌지장편」은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의 연혁을 소개한 다음 문물제도 전반을 간결한 필치로 해설한 것이며, 「춘명일사편」은 권24까지의 내용 가운데에서 누락된 사실 및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사실을 간추려서 수록한 것이다. 저자가 한말 시기에 조정의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본서의 많은 부분에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과 견문이 망라되어 있어서 특히 한국 근세사의 일면을 연구하는 데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유서의 효용성

유서가 출현하자 문장가는 전고나 시문을 검색하기 편리하게 되었으며, 주서가(註書家)는 남의 글을 표절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므로 모두가 다투어 출판함에 따라서 실제적인 학문은 자못 피해를 입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서의 산일이 심한 상황에서 유문(遺文) 구사(舊事)가 흔히 유서에 힘입어서 보존될 수 있어서 학문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유서의 효용성은 다음과 같다.

① 시문을 검색함:유서에는 특정한 사물이나 문자에 관한 미사여구를 집록하였으므로 시부 작문에 이를 채택, 인용할 수 있다.

② 전고의 출처를 밝힘:고서 중에는 전고 사실이 도처에 수록되어 있으나 사람들은 그 출처를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으므로 유서를 통하여 그 출처를 알 수 있으며, 또 난해한 전고를 밝히는 데에도 유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③ 고사(故事)의 변천을 고찰함:고대의 소설이 후세까지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매우 적다. 그러나 후세의 소설이나 희극의 고사는 그 대부분이 고대로부터 있었던 것이며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은 고사변천의 자취는 유서 속에 많이 남아 있으므로 유서를 통하여 고찰할 수 있다.

④ 고서의 유문을 집일(輯佚)함:서적은 전란이나 화재로 말미암아 손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존하기는 어렵고 망실되기는 쉽다. 고서는 판각되기 이전에는 그 부수도 매우 적었으며, 어떤 서적은 판각조차 되지 않아 사람들이 더 이상 베껴 쓸 수 없게 되었으며, 또 판각은 되었으나 서적이 망실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일서의 내용은 단지 고서의 주소(注疏)나 유서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⑤ 전본(傳本)의 오류를 교감(校勘)함:각판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 서적은 일반적으로 판각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대개 개인의 교감을 거쳐 전사(轉寫)되었으므로 동일 서적일지라도 내용에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

또, 서적을 판각하기 시작하고부터는 더 이상 베껴 쓰려고 하지 않아서 고서는 날로 일실되게 되었으며, 비록 판각을 하는 경우에도 착오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교감할 때 서로 다른 전본으로 교정할 뿐 아니라 유서를 흔히 이용하였다. 이와 같이 유서는 전고의 출처를 밝히고, 고사의 변천을 고구하며, 고서의 유문을 집일할 뿐만 아니라, 전본의 오류를 교감할 때 반드시 필요한 서적이다. → 백과사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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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星湖僿說)』(이익)
『성호사설류선(星湖僿說類選)』(안정복)
『고사신서(攷事新書)』(서명응)
『물명고(物名考)』(유희)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이규경)
『임하필기(林下筆記)』(이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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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參考用書指引』(張錦郞 編, 臺北: 文史哲出版社, 1980)
『談類書』(于大成, 出版家 50·51, 1976)
『說類書』(勞幹, 新時代 1卷 7期,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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