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국에서는 유학(儒學)의 경서(經書) 숭상의 전통에 따라 경서의 내용이 과거(科擧)에 출제되었으므로 고전(古典)의 발췌와 주석(註釋)을 모아 유별로 분류한 유서(類書)가 중요시되었으니, 이 유서가 곧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현대의 백과사전은 근대 유럽문화의 산물이며 최신의 지식을 망라하려고 노력하는 것임에 대하여, 유서는 유학의 권위를 고양하려는 의도에서 산출되었으며 분류에 의하여 고지식(古知識)을 집성(集成)하고 성현의 언행을 전승함을 이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백과사전은 그 등장 초기에는 항목의 배열을 분류별로 하였으나 점차 알파벳 또는 가나다순 배열이 지배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이 점은 언어사전(言語辭典)의 배열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사전(辭典)은 언어의 해석, 어원, 철자, 발음 등 모든 언어에 관한 지식을 설명한 것이고, 사전(事典)은 각 사항에 관한 지식을 설명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한자로는 백과사전을 언어사전과 구별하여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백과사전(百科事典)이라 칭하게 되었다.
백과사전을 뜻하는 영어의 encyclop(a)edia, 프랑스어의 encyclopedie, 독일어의 Enzyklopädie는 어느 것이나 그리스어의 egkuklios paideia를 어원으로 한 것이다. 이는 원만함을 뜻하는 egkuklios와 교육을 뜻하는 paideia가 합성된 것으로 ‘원만한 지식의 교육’을 의미하며, 그리스 학자들의 교육이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백과사전은 원래 유명한 소수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유별로 집성하는 대항목주의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새로운 지식정보를 직접 신속히 얻으려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소항목주의와 사전체(辭典體) 방식을 채택하는 백과사전이 많아지고 있다.
유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진 동양 고유의 백과사전이다. 이는 동양의 경(經)·사(史)·자(子)·집(集)의 전 영역 또는 일정 영역에 걸친 많은 서적으로부터 고실(故實)·시문(詩文) 등의 사항을 유별(類別) 또는 자별(字別)로 분류, 편찬하여 검색하기 편리하게 만든 책이다.
유별로 분류한 유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 유(類)를 모두 수록한 유서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특정한 유만을 수록한 유서이다. 자별로 분류한 유서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어구(語句) 끝 자의 운(韻)에 의하여 배열한 유서이며, 다른 하나는 어구 첫 자의 운에 의하여 배열한 유서이다.
유서는 많은 서적으로부터 사항을 뽑아 유별 또는 자별로 분류, 편집한 것이므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분류체제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즉, 유별로 분류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유문(類門)을 설정하였고, 찾고자 하는 사항이 어느 유문에 속하는가를 알아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또 자별로 분류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찾고자 하는 글자가 어느 운에 속하며 또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해야 쉽게 찾을 수 있다.
로마시대에 플리니(Pliny)가 편찬한 『박물지(Naturalis Historiae)』는 서양 백과사전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 편찬방식은 동양의 유서와 같은 것으로 중세에서 17세기까지의 백과사전은 이러한 편찬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서명에 encyclopaedia라는 용어를 사용한 근대백과사전은 1630년에 간행된 독일인 알스테드(Alsted,J.H.)의 백과사전 『Encyclopaedia Septem Tomis Distincta』였다.
또 모레리(Moreri,L.)는 1674년에 『역사대사전(Le Grand Dictionnaire Historique)』을 간행하였는데 역사사전에 알파벳순 배열을 시도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모레리 이후의 백과사전은 알파벳순 배열이 일반화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적 백과사전이 출현하였다. 1728년에 체임버스(Chambers, E.)에 의하여 간행된 『백과사전(Cyclopaedia)』은 겨우 2권으로 된 것이었으나, 각 항목에 학자들의 논문을 수록하고 알파벳순으로 배열하였으며, 상호참조방식을 채용함으로써 이후 백과사전의 모범이 되었다. 체임버스는 이후 증보판을 많이 출판하였으며 외국에서도 추종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시대의 대표적 사업은 디드로(Diderot)를 중심으로 달랑베르(d’Alembert)의 협력을 얻어, 몽테스키외(Montesquieu)·뷔퐁(Buffon)·루소(Rousseau) 등 이른바 백과전서파 사람들을 기고가(寄稿家)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 『백과전서(Encyclopedie, ou Dictionnaire Raisonne des Sciences, des Artes et des Metiers)』 제1·2권이 1751년에 발간되었으나 이듬해 발행금지처분을 받았다.
디드로는 이에 굴하지 않고 1751년부터 1772년까지에 걸쳐서 도판과 함께 28권을 완성하였고, 1776∼1777년에는 보유 5권을, 또 1780년에는 색인 2권을 간행함으로써 모두 35권을 완성하였다.
다음으로 현대백과사전의 시초는 1768년부터 1771년까지에 걸쳐서 영국에서 간행된 『브리타니카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으로, 초판은 3권이었으나 이후 판을 거듭함에 따라서 내용이 정비되고 책 수도 증가하여 세계 백과사전의 모범이 되었다. 1920년에 미국 시카고의 시어즈가 매수하여 1936년부터 매년 개정, 발행하고 있으며, 별도로 연감을 개정, 증보하여 발행하고 있다.
이 밖에 오늘날 세계의 백과사전계에서 유명한 것으로는 영국의 『체임버스백과사전(Chambers’s Encyclopaedia)』·『에브리맨즈백과사전(Everyman’s Encyclopaedia)』, 미국의 『아메리카나백과사전(Encyclopedia Americana)』·『콜리어즈백과사전(Collier’s Encyclopedia)』, 프랑스의 『프랑스백과사전(Encyclopedie Francaise)』·『라루스대백과사전(Grand Larousse Encyclopedique)』, 독일의 『브로크하우스백과사전(Der Brockhaus Enzyklopädie)』, 이탈리아의 『이탈리아백과사전(Enciclopedia Italiana)』, 소련의 『소비에트백과사전(Bol'shaya Sovetskaya Entsiklopediya)』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백과사전이 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진 유서라는 명칭의 백과사전이 있다. 유서라는 명칭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송(宋)나라 인종 때 편찬된 두 서목(書目) 『숭문총목(崇文總目)』과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의 병부(丙部)에 유서류(類書類)를 분류법상의 일문(一門)으로 독립, 설정하고 해당하는 서적명을 열거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와 같이 문헌상으로는 유서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위의 두 서목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실제 유서의 기원은 이보다도 훨씬 이전으로 소급된다. 중국의 유서는 처음부터 시문(詩文)을 참고하기 위해서 편찬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 뒤 과거가 실시되고 관리의 등용시험에 시부(詩賦) 이외에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논문을 시험하였으므로, 초기의 유서가 시문 중심으로 편찬되었던 것에서부터 점차 제왕(帝王)의 정치를 중심으로 군신(君臣)의 사적(事蹟), 국가의 문물제도를 알리는 것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유서는 그 성질상 앞서 편찬된 유서를 참고하기 위하여 칙명(勅命)으로 관찬(官撰)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 내용이 점차 방대한 것으로 되었다.
중국 최초의 유서인 『황람(皇覽)』은 위(魏)나라 문제(文帝) 때 편찬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산일되었으며, 그 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화림편략(華林遍略)』이, 북제(北齊) 때에는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이 편찬되었으나 모두 일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당대(唐代)에 편찬된 유서는 더욱 많았으나 지금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우세남(虞世南)이 편찬한 『북당서초(北堂書鈔)』 160권, 구양순(歐陽詢)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예문유취(藝文類聚)』 100권, 백거이(白居易)가 편찬한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 서견(徐堅)이 편찬한 『초학기(初學記)』 30권 등이 있다.
송대(宋代)에 들어오면서 유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분량이 1,000권을 헤아리게 된다. 송대의 유서 중 중요한 것으로는 이방(李昉)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태평어람(太平御覽)』 1,000권, 왕흠약(王欽若)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책부원구(冊府元龜)』 1,000권 등이 있는데, 『태평어람』과 『책부원구』는 다 같이 송대 유서의 으뜸이다.
이 밖에 민간에서는 왕응린(王應麟)이 편찬한 『옥해(玉海)』 200권이 명저이다. 원대(元代)에는 음시부(陰時夫)가 『운부군옥(韻府群玉)』 20권을 편찬하였는데, 운(韻)에 의하여 배열, 편찬된 것으로서는 현존 최고(最古)의 유서이며 현재 통용되는 운서 가운데에는 이 책을 모방한 것이 많다.
명대(明代) 이르러서는 유서의 규모와 수량이 전술한 각 시대의 그것을 크게 능가하게 되었으며,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해진(解縉)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영락대전(永樂大典)』 2만 2877권이다. 민간의 유서로는 장황(章潢)이 편찬한 『도서편(圖書編)』 127권과 왕기(王圻)가 편찬한 『삼재도회(三才圖會)』 106권이 유명하다.
청대(淸代)는 유서의 전성시기로서 그 수량에 있어서 명대를 훨씬 능가한다. 청대에 편찬된 유서 중에서 특기할 것은 성조(聖祖) 때에 진몽뢰(陳夢雷)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하고 장정석(蔣廷錫)이 개정(改訂)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1만 권으로서, 이는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한 중국 최대의 유서이다.
이 밖에도 주요한 것으로는 장영(張英)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연감유함(淵鑑類函)』 450권, 장정옥(張廷玉)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자사정화(子史精華)』 160권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유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많은 유서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언제부터 어떤 유서가 편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에서 우리나라 현존 최고(最古)의 유서는 1554년(명종 9)에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고사촬요(攷事撮要)』 2권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조선사회의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서리(胥吏) 및 항거(巷居)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응당 알아야 할, 이른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비롯해서 일상생활에 이르는 제반사항을 22항목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이다.
선조 때에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 20권은 원나라 음시부가 편찬한 『운부군옥』의 체재를 모방하여 전체를 106운으로 나누고, 각 운에 이에 해당하는 동운자(同韻字)를 열거하였으며, 각 운자 아래에는 일정한 유목(類目)에 따라 끝에 동운(同韻)이 오는 2·3·4자 등으로 된 성어(成語)를 적고, 단군에서부터 선조 때까지의 우리나라 문물제도 전반에 걸친 고사(故事)를 뽑아 수록하였다.
『대동운부군옥』은 자별(字別)로 분류한 유서, 즉 운자에 의해서 분류된 유서 중에서도 성어의 끝 자의 운에 의하여 배열된 유서라는 점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유서는 1614년(광해군 6)에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지봉유설(芝峰類說)』 20권이다.
『지봉유설』은 전체 내용을 25부문 183항목으로 나누고 각 항목을 다시 3,435조목으로 세분하여 각 조목에 해당하는 고실(故實) 및 문견사실을 고금서적으로부터 뽑아 편찬한 것이다. 경제적 문장과 과학적 서술로 말미암아 실학사상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李瀷)이 편찬한 『성호사설(星湖僿說)』 30권은 천문·지리·정치·제도·경제·사상·경(經)·사(史) 등의 내용을 5부문 3,057항목으로 세분하여 각 항목에 해당하는 사항을 모아 배열하였다. 이는 실학사상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순조 때의 실학자 유희(柳僖)가 지은 『물명고(物名攷)』 5권은 조수(鳥獸)·초목(草木)·금석(金石)·수화(水火) 등에 관한 물명(物名)을 유정류(有情類)·무정류(無情類)·부동류(不動類)·부정류(不靜類)의 4부류로 나누고, 이를 다시 14항목으로 세분하여 각 항목마다 이에 해당하는 물명·형성(形性) 등의 사항을 나열하였다.
본서는 물명을 기록할 때 대부분의 경우 한자명 이외에 한글 이름을 적어 놓았으므로 국어학 연구에 특히 유용한 자료가 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60권은 정조에서 철종 대에 걸쳐 활약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많은 서적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기타 외국의 고금사물과 전고(典故)를 뽑아 고증하여 1,414항목으로 세분하여 수록한 것이다. 본서는 우리나라 전고를 참고할 때 특히 긴요한 서적이다.
고종 때에 이유원(李裕元)이 편찬한 『임하필기(林下筆記)』 39권은 많은 서적으로부터 우리나라의 문물제도 및 전고 등 광범한 분야에 걸친 사항을 뽑아 전체 내용을 16편(編)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3,568항목으로 세분하였다.
저자는 고종 20년을 전후한 한말에 조정의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본서의 많은 부분에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과 견문이 망라되어 있어서 특히 한국근세사의 일면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서이다.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00권은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유서(官撰類書)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대 문물제도를 13부문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약 5개월이라는 단시일에 급속히 편찬되어 잘못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았으므로 1782년(정조 6)에 이만운(李萬運) 등이 왕명을 받아 이의 수정에 착수하여 1796년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146권을 20부문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또 1908년(융희 2)에는 다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250권이 편찬, 간행되었다. 『증정문헌비고』는 1903년(광무 7)에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학자들이 왕명을 받아 홍문관에서 『증정문헌비고』 를 다시 증보, 수정하여 16부문으로 나누어 편찬한 것이다.
2차로 편찬된 『증정문헌비고』와 3차로 완성된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대로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서지(書誌)를 다룬 예문고(藝文考) 항목이 수록되어 있음이 특기할 사항이며, 우리나라 문물제도 전반에 관한 대표적인 유서이다.
현대적 백과사전은 광복 이후에 비로소 간행되었다. 1958년에는 학원사(學園社)에서 『대백과사전』 6권을 출간하였고, 이듬해 1959년에는 동아출판사(東亞出版社)에서 단권으로 된 『새백과사전』을, 그리고 1964년에는 다시 『국민생활백과사전』 2권을 간행하였다.
학원사에서는 이후 증보판 2권을 출간하였으며, 1967년에는 개정판 『세계백과대사전』 12권을 출간한 데 이어 1970년과 1973년에는 각각 15권과 20권에 달하는 신판을 간행하였다.
또 1974년에는 태극출판사(太極出版社)에서 『대세계백과사전』 16권이 출간되었는데, 이전까지의 백과사전이 항목별 가나다순 배열방식으로 되었던 것임에 반해 이 『대세계백과사전』은 장르별로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백과사전 간행사상 특기할 것은 1983년에 완간된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30권으로, 본서는 그 기술내용에 있어서나 항목수와 사진·도판의 풍부함에 있어서 현대백과사전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한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1980년 편찬에 착수하여 1991년에 본 책 25권, 부록 2권 등 27권 규모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을 발간하였다. 이 책의 발간 취지와 목적은 "한민족이 이룩한 문화유산과 업적을 정리, 집대성하여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편찬함."에 있었다. 이 사전은 광복 이후 정부의 지원 하에 수행된 가장 성공적인 문화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992년 세종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밖에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서는 한글판 『세계대백과사전』을 1988년에 시작하여 1994년에 완간하였다. 영문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 지적 유산의 정수를 포함하면서 그 가운데 30%를 한국 관련 항목으로 편찬한 것이다.
1990년대 정보화 시대, 즉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백과사전은 CD·ROM과 DVD·ROM,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출판 분야로 방향을 전환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