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고사촬요』, 『패관잡기』 등을 저술한 문인·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533년(중종 28)하절사(夏節使)를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1536년(중종 31)에 원영사(遠迎使) 소세양(蘇世讓)을 따라 의주(義州)에 머물며 시(詩)를 논했다. 1537년(중종 32)에 이문학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을 수행했는데, 중국 사신이 ‘학관(學官)’이란 칭호를 ‘학교의 관(官)’으로 잘못 알고 시를 써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540년(중종 35)에는 교서관(校書館)의 감교관(監校官)으로 있었다.
김안국(金安國)의 요청으로 찬집국(纂集局)이 설치돼 『이문제서집람(吏文諸書集覽)』 편찬하는 데 참여해 『이문(吏文)』·『속이문(續吏文)』을 편찬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541년(중종 36) 김안국의 건의로 문과(文科)와 같은 제도를 갖춘 한리과(漢吏科)가 설치돼 첫 회 시험에 합격했으나, 김안국이 죽자 한리과(漢吏科)는 폐지된다. 같은 해에 하절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다녀왔다.
1554년(명종 9)에 『제왕역년기(帝王曆年記)』·『요집(要集)』이 그 내용이 소략하고 상세함이 한결같지 않음을 보고는 두 책을 참조해 『고사촬요(攷事撮要)』를 지었다. 당시 영의정인 심연원(沈連源)과 대제학(大提學) 정사룡(鄭士龍) 등의 주선으로 주국(鑄局: 활자를 만드는 관청)에서 인쇄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중국어에 뛰어나 외교에 많은 이바지를 했으며, 아는 게 많고 글에 뛰어나 시를 평론하는 데에 일가를 이루어 이이(李珥)를 가르칠 정도였다. 그러나 출신이 미천해 끝내 높은 관직에 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별묘(別廟: 가묘에서 받들 수 없이 된 신주를 모시는 사당)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에 있다.
『고사촬요』 외의 저서로는 『패관잡기(稗官雜記)』 6권이 있는데, 『대동야승(大東野乘)』과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수록돼 그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패관잡기(稗官雜記)』
- 『고사촬요(攷事撮要)』
- 『조야집요(朝野輯要)』
- 『한국계행보(韓國系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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