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사건 ()

근대사
사건
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사건.
정의
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사건.
역사적 배경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한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고(西鄕隆盛)와 같은 급진파는 당장 조선정벌을 주창하고 나섰다. 반면 이와쿠라견외사절(岩倉遣外使節)로 구미 각국을 순방하고 귀국한 기도(木戶孝允)·오쿠보(大久保利通)와 같은 온건파는 점진적 정한론을 내세우며 급진파를 견제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조선정벌을 보류하고 호전적 무사계급의 불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1874년 5월 대만정벌을 단행하였다. 일본의 군국적 침략정벌을 당한 청나라는 일본이 장차 한국정벌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한 자문(咨文)을 조선정부에 보냈다.

자문에서 청나라는 프랑스제독 지켈(Giquel,P.M.)의 의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일본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정벌을 수행한 뒤 나가사키에 주둔 중이며, 장차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 프랑스·미국도 조선과의 관계가 미해결상태(병인양요·신미양요)로 있기 때문에, 조선이 서둘러 프랑스·미국 등과 통상관계를 체결한다면 일본은 고립되어 감히 동병(動兵)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한반도의 안보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자문을 받은 조선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일교섭의 당국자인 동래부사·부산첨사 등 대원군 일파를 파면하였다.

한편, 조선정부에도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토록 강경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민씨척족세력이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에게 있어 대원군의 실각은 고무적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부산 왜관(倭館)주재관 오쿠(奧義制)는 즉각 본국 정부에 대원군 실각으로 일본의 대한교섭이 유리해졌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조선 정정(政情)을 탐지하기 위해 모리야마(森山茂)를 급히 부산에 파견하였다.

모리야마는 “일본의 대만정벌소식을 듣고 조선은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다소의 위력을 보임이 좋겠다.”라고 본국 정부에 대한(對韓) 강경 방침을 건의하였다. 조선 정부는 부산훈도(釜山訓導) 현석운(玄昔運)에게 모리야마를 만나 일단 한일국교재개교섭에 합의를 보도록 하였다.

한일 간의 수교교섭의 기초를 마련한 모리야마는 1875년 2월 이사관으로 부산에 재차 부임, 현석운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한일 간 서계(書契)의 형식, 연회시의 복장 등 여러 문제로 의견이 충돌하여, 교섭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모리야마는 4월 15일 강경한 대한포함외교(對韓砲艦外交)를 주장하는 건의서를 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에 의하면, 첫째 조선은 지금 내홍(內訌)이 심하고 만약 대원군이 재득세하면 또다시 쇄국정책이 강화될 것이므로 쇄국양이당(斥邪派)이 세력을 만회하기 전에 무력을 사용하면 조선개항은 성취될 수 있다.

둘째 일본 군함 1, 2척을 파견, 해로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일본이 대한교섭에 유리한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 데라시마(寺島宗則)는 ‘연안측량을 빙자, 군함을 조선근해에 출동, 위혁(威嚇 : 협박)함이 국면타개의 최선책’이라는 모리야마의 대한강경책을 받아들여, 마침내 해군성과 협의,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5월초 운요호·제이정묘호(第二丁卯號) 등 군함 2척을 부산에 파견하면서, ‘조선국 해로를 연구하기 위한 회항(回航)’이라는 구실로 군함 출동을 단행하였다.

결과

운요호가 5월 25일부산에 입항하자, 당황한 현석운은 왜관을 방문하여 군함파견 목적을 따졌다. 이에 일본은 “교섭천연(交涉遷延)의 책임을 일본이사관에게 묻기 위해 왔다.”고 거짓으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연안을 종횡무진 탐측하면서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하였다. 심지어 이노우에(井上良馨)함장은 6월 14일조선 측의 항의를 무시하고, 현석운 등 조선관리를 운요호에 승선시키고 일본군함 2척의 합동발포연습을 관람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을 강행할 것임을 과시하였다.

또한 운요호는 조선 동해안으로 북상, 영흥만(永興灣)까지 순항하면서 무력적 시위를 벌였다.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측, 시위한 뒤 운요호는 1875년 9월 20일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하였다.

이노우에 이하 수십 명의 해병은 담수(淡水) 보급의 명목으로 보트에 분승, 해로를 탐측하면서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하였다.

강화해협(鹽江 또는 京江)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정당방위로 침입해오는 일본의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노우에는 모함인 운요호로 철수하며,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포격을 가하였다.

오후에는 제물포 대안의 영종진(永宗鎭)에 보복공격을 단행하였다. 일본군 수병 22명이 영종도에 상륙작전을 펼쳐 일대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화력이 약한 노후한 병기를 가진 조선수비병은 근대식 대포와 소총을 휴대한 일본을 대적할 수 없었다.

결국 첨사 이민덕(李敏德)이 이끄는 400∼500명의 조선수비병은 패주·분산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일본 측은 경상자 2명뿐이었다. 일본군은 조선대포 36문, 화승총 130여 자루 등을 약탈하고, 영종진에 대한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운요호포격사건은 근대제국주의적 영토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운요호의 강화해협침입 자체가 영토침략 또는 주권침해행위이기 때문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조선의 국방안보상 가장 중요한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의 해상관문이다. 멀리 고려시대의 40년에 걸친 대몽항쟁(對蒙抗爭)을 벌인 군사적 근거지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기에 강화도 전체를 요새화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왔던 것이다. 특히, 1866년 프랑스의 내침(병인양요), 1871년 미국의 내침 (신미양요) 등 19세기 후반기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이에 조선정부는 병인양요 이래로 “외국군함의 항행을 금지한다.”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비석을 강화해협 입구에 세우고, 일체 외국배의 통항을 금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내국선이라도 노인(路引 : 항행권)이 없이는 항행을 금하였다. 이처럼 금지된 수역을 조선 당국의 허가 없이 침입하여 탐측활동을 벌이는 것은 엄연한 영토침략행위이고, 주권침해이므로 이에 대한 포격은 조선의 정당방위에 입각한 자위책인 것이다.

일찍이 미국·프랑스 등 구미열강은 대한포함외교정책으로 조선원정을 단행, 조선개항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양이정책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강경한 대한포함책략에 의한 무력적 위협과 함대시위로 1876년 2월 26일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체결을 성취시킬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근대한미교섭사(近代韓美交涉史)』(김원모, 홍성사, 1979)
「강화도(江華島)조약의 체결(締結)과 그 영향(影響)」(최영희, 『한국사』 16, 1981)
『日本外交文書』
『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伊藤博文, 原書房, 1970)
집필자
김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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