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한성부좌윤,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524년(중종 19)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 봉양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7년(중종 22) 사헌부지평 · 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영광군수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532년(중종 27) 사헌부로 다시 옮겨 장령 · 집의를 역임하고, 1537년(중종 32)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인 1538년(중종 33) 공조참판 · 사헌부대사헌 · 한성부좌윤 · 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39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공조 · 병조 · 이조의 참판을 두루 지냈다.
이듬 해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형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폐의 시정에 힘썼다. 1542년(중종 37) 내직으로 옮겨 한성부의 우윤 · 좌윤을 지내고,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세 번째로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544년(중종 39)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네 번째로 대사헌이 되고,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조판서 역임 시 윤원형(尹元衡) · 이기(李芑) 등과 모의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시켰다. 이 사건을 주도한 공로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자품은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그 해 삼의정이 병약해 그가 우찬성의 지위로 사은사에 선발되어 다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1546년(명종 1) 공무를 마치고 귀국 도중 영평부(永平府)에서 돌연 병사하였다. 시호를 처음에는 공소(恭昭)라 했다가 후에 충헌(忠憲)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경연일기(經筵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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