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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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만동묘
유교
유적
국가유산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조선후기 명나라의 신종을 위해 세운 사당.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괴산 만동묘정비(槐山 萬東廟庭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충청북도
종목
충청북도 시도기념물(1978년 10월 27일 지정)
소재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화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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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조선후기 명나라의 신종을 위해 세운 사당.
내용

민정중(閔鼎重)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넉 자를 얻어다가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었다.

1674년(현종 15)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 현재의 彩雲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그곳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또한 김수항(金壽恒)은 장편의 글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여 놓았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遺命)으로 부탁하였다. 권상하는 이에 따라 1703년 민정중 · 정호(鄭澔) · 이선직(李先稷)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지냈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그 뒤 1726년(영조 2) 민진원(閔鎭遠)이 묘(廟)를 중수하고 그 전말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관둔전(官屯田) 5결(結)의 제전(祭田)과 노비를 주었다. 1744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하여금 묘우(廟宇)를 중수하게 하는 한편, 화양리에 있는 토지 20결(結)을 면세전(免稅田)으로 하여 제전에 쓰도록 하였다.

또, 1747년에는 예조에서 90인이 윤번으로 묘우를 수직(守直)하게 하고 사전(賜田)에 전(廛)을 개설, 그 세전(稅錢)을 만동묘에서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 해이재(李縡)의 찬(撰), 유척기(兪拓基)의 전서(篆書)로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졌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어필로 사액(賜額)하고, 1809년(순조 9)에는 기존의 묘우를 헐고 다시 짓게 하였다. 1844년(헌종 10)에는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로 하여금 정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에 1865년(고종 2)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므로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방(紙榜)과 편액(扁額)을 서울에 있는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했다.

그 뒤 유생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활되지 않다가 1873년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송내희(宋來熙) · 임헌회(任憲晦) · 이항로(李恒老) · 최익현(崔益鉉) · 송근수(宋近洙) · 송병선(宋秉璿) 등 유림들이 소를 올려 이듬 해인 1874년 왕명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이것은 민비(閔妃) 일파가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취한 조처였다.

1907년 일본군이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폐철함과 동시에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1910년 송병순(宋秉珣) 등이 존화계(尊華契)를 조직, 봉제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일제치하에서도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계속되다가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영영 끊기게 되었다. 마침내 1942년 만동묘 건물을 철거,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하였다.

만동묘의 건물은 묘우(廟宇) 5칸, 정침(正寢) 3칸, 동 · 서 협실(夾室) 각 1칸, 성공문(星拱門) 3칸, 좌 · 우 협문(夾門) 각 1칸, 좌 · 우 낭(廊) 각 3칸, 신주(神廚) 중 1칸, 동방(東房) 1칸, 서방(西房) 2칸 등으로 운영담(雲影潭) 위쪽, 낙양산(洛陽山) 밑에 북향으로 위치해 있었다.

묘우에는 지패(紙牌)를 봉안하고, 정침과 동 · 서 협실은 제관의 숙소 또는 유림들의 회합이나 학문 토론 장소로 쓰였고, 신주 중 1칸과 동방 1칸은 제물의 봉진(奉進)에, 서방 2칸은 집사(執事)의 숙소로 각각 쓰여졌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上丁)에 봉행되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묘우 및 부속건물은 철거된 채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으나 1983년 홍수 때 만동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1978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
『영조실록』
『존주휘편(尊周彙編)』
『화양지(華陽誌)』
『청선고(淸選考)』
『춘관통고(春官通考)』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정교)
『충북연감(忠北年鑑)』
『청주지(淸州誌)』
『송자대전(宋子大全)』(송시열)
『한수재집(寒水齋集)』(권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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