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원주 출신.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원광명(元廣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중량(元仲良)이다. 아버지는 별장 원헌(元憲)이며, 어머니는 원천상(元天常)의 딸이다.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차례로 지냈으며,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하였다. 강가에 나가서 시가를 읊기도 하고 혹은 집에서 글을 짓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원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앉을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단종의 장릉(莊陵)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조카인 판서 원효연(元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
손자인 원숙강(元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운 후, 아들들에게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가 세워지고, 1703년 원천석(元天錫)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1782년(정조 6)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