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유(大有).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평생동안 정성껏 모셨다. 특히, 아버지의 병환을 구하기 위하여 한겨울에 잉어를 잡아바친 일화가 전한다.
일찍이 생원이 되었으며, 성종이 그의 효행을 듣고 1473년(성종 4) 남부참봉(南部參奉)에 특별히 제수하였으나 어머니의 상을 치르기 위해 나가지 않았다. 1476년에 성종이 다시 불러들여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한겨울에 잉어를 잡은 경위와 경서(經書) 가운데 으뜸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자식으로서는 효도를 다하고 신하로서는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성종이 그를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에 제수하였다. 뒤에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옮겼다.
청주에 양수척(揚水尺: 무자리)의 세 형제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였는데, 경연의 효성이 지극함을 듣고는 개과천선하였다고 전한다. 신항서원(莘巷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