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자무(子武). 아버지는 주부 강여중(康汝中)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 교도(敎導)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1455년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재임중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58년(세조 4)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북변의 방어책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조정에서 야인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자, 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使)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였다.
이때 기병 백여기를 거느리고 수주(愁州: 지금의 함경북도 종성)로부터 하이란(河伊亂)을 공격, 모련위야인(毛憐衛野人)의 소굴을 습격하여 430여급(級)을 초살(剿殺)하고 실려(室廬) 900채를 불살랐으며 우마(牛馬) 천여마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러한 공으로 예조참의에서 예조참판으로 승진되었다.
1461년 북정군(北征軍)의 공신록에 책록되고 함길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1464년에는 함흥부윤을 겸하였다. 1466년 함길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관내의 각 진관(鎭管)을 순시하던 중 전 회령부사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켜 그 당여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모반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죽였다는 이시애의 거짓보고에 세조는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함길 · 강원 · 평안 · 황해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로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하는 한편 반역으로 논죄하였으나, 1471년(성종 2) 사실이 밝혀져 고신(告身: 관직 임명사령장)과 재산을 되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