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은 신라시대에 시조(始祖)를 제사하던 성소(聖所)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근거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설과 김씨왕조에 의해 설립되었으므로 김알지 등 김씨 왕에게 제사지냈다는 설이 있다. 이외에 초월적 신화적 존재로서 곡령(穀靈) 또는 태양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왕이 즉위한 다음 해 또는 후년 봄에 신궁에서 즉위의례를 거행하였다. 6세기 후반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성립과 야와타신[八幡神]신앙의 토대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신궁(神宮)의 설치연대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서는 487년, 즉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9년이라고 했으나,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서는 지증왕(智證王) 때라고 하였다. 따라서 신궁 설치시기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신궁의 설치배경은 주로 신라의 정치 · 사회적 발전과정과 관련해 논의되어 왔다. 이 중에서도 골(骨)의 분화에 따라 박혁거세라는 종래의 추상적이고 형식적 시조숭배가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가조(家祖)숭배로 변화되었다거나, 또는 내물왕계 출계집단(出系集團, lineage) 내부의 결합을 위한 종교적 상징으로 설치되었다는 등 친족집단의 분지화(分枝化)문제와 관련시킨 견해가 있다.
혹은 안으로는 중앙집권화과정에서의 사상통일을 위한 기반조성, 밖으로는 자주적 국가의식의 고취의 필요성에서 설치되었다는 견해 등이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밖에도 신궁의 설치를 교사(郊祀)를 비롯한 중국 의례 내지 유교 의례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와 기존에 있던 시조묘가 천변지이(天變地異)에 대한 효험이 없자 새로운 종교적 성소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중국 의례가 신궁제사에 영향을 주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후자는 신궁설치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다.
신궁은 시조가 탄생한 곳인 나을(奈乙)에 설치했으므로 신라의 시조를 제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①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인 나정(蘿井)은 나을과 음이 통한다는 점, 신라시대에는 부계(父系)혈족집단이라는 관념이 강하지 않았으므로 김씨왕(金氏王)들도 이성(異姓)인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실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여 주신을 박혁거세로 보는 설이 있다.
② 반면에 박혁거세를 제사하는 시조묘(始祖廟)가 있는데 또 신궁을 설치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으며, 신궁이 설치된 시기는 김씨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근거로 신궁의 주신을 김씨 시조로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씨 시조 중에서도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김알지설(金閼智說) · 성한설(星漢 · 聖漢說) · 미추왕설(味鄒王說) · 내물왕설(奈勿王說) 등으로 나누어진다.
③ 이때의 시조란 인간으로서의 역사적 시조가 아니라 역사를 초월한 신화적 존재 내지 신적 존재로서의 곡령(穀靈) 또는 태양신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에 최근에는 신궁의 주신은 시조신이 아니라 천지신(天地神) 또는 천신(天神)이라는 설이 유력한 견해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신궁 연구에서 주신의 문제는 중요한 쟁점의 하나였지만, 이와 같이 아직 의견의 접근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궁에서의 의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왕이 즉위한 다음해 또는 후년 봄에 친히 신궁에서 거행하는 제사인데, 이 의례는 신왕의 즉위의례로 해석되고 있다.
이 외에 신궁에서는 매년 봄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 등 각종 국가차원에서의 제사가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신라의 신궁은 6세기 후반 일본 왕가의 시조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제사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7세기 말에는 왕권강화에 반발하다 쫓겨난 신라귀족들에 의해 북구주(北九州)지방으로 전파되었고, 이후 그것은 야와타신[八幡神]신앙의 성립에 토대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