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묘(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강학년을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