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인 일에 나아가 옳음을 구한다.’, ‘사실을 얻는 것을 힘쓰고 항상 참 옳음을 구한다.’로 풀이되고 있다. 본래 이 말의 출전은 ≪한서 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보이는데, 중국에서는 청대 고증학자들에 의해서 하나의 학문 방법론으로 중시되었다.
고증학의 학풍은 경전의 일자일구(一字一句)에 대해 정확한 훈고(訓詁)를 하는 것으로서 한 · 당대(漢唐代)의 훈고학풍과 비슷한 경향을 지닌다. 이것은 송 · 명대(宋明代)에 한당유학에 결여되어 있던 철학의 이론 체계를 확립시킨 성리학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고증학자들은 송명이학(宋明理學)이 경전의 본뜻에 어긋난 주관적인 해석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공담(空談)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김정희(金正喜)의 ‘실사구시론’이 유명하다. 그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학문을 하는 데 가장 요긴한 방법이다. 만약 실사(實事)를 일삼지 않고 공소(空疎)한 학술만을 편하다고 여기고, 그 옳음은 구하지 아니하고 선인(先人)의 말만을 위주로 하면 그것은 성현의 도에 배치된다. 한유(漢儒)들은 경전을 훈고함에 실사구시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진(晉) 이후로 노장(老莊)과 불교가 극성함에 학술이 일변해 실사구시와는 상반되었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성리(性理) 등의 일에서 도학(道學)을 천명해 옛사람이 발하지 못한 바를 발하기도 하였으나 오직 육왕학파(陸王學派) 등이 공허함을 답습해 유학을 불교에 끌어들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불교를 유학에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학문의 도는 이미 요 · 순 · 우 · 탕 · 문 · 무 · 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을 귀착점으로 삼은즉 마땅히 실사구시해야 하며 공허한 이론을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학자는 한유들이 정밀하게 훈고하는 것을 높이 본받아야만 한다. 성현의 도는 비유컨대 큰 저택과 같아서 주인은 항상 당실(堂室)에 거처하고, 당실은 문지방을 통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훈고하는 일은 마치 문지방과 같다. 그러므로 학문을 함에 반드시 정밀한 훈고를 구하는 것은 당실에 잘못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훈고로만 끝내야 할 일도 아니다. 한유들이 당실을 깊이 논하지 않는 것은 문지방이 잘못되지 않으면 당실도 스스로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송(晉宋) 이후 학자들은 고원(高遠)한 것만을 힘쓰고 공자를 높이면서 성현의 도는 이와 같이 천근(淺近)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문지방을 싫어하고 박대해 내팽개치고는 별도로 신묘하고 고원한 것을 초월한 곳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대저 성현의 도는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데 있으니, 공허한 이론은 숭상하지 말아야 하며, 실한 것은 마땅히 탐구하고 허한 것은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길은 반드시 한학(漢學) · 송학(宋學)으로 나눌 것도 아니고 정현(鄭玄) · 왕충(王充)의 훈고학과 정주(程朱) 성리학의 장단점을 비교할 것도 아니며, 주자학과 상산학(象山學) 등의 문호를 다툴 것도 아니다. 다만,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되, 오로지 실사구시 한마디 말을 주로 하여 실천하면 된다.”
여기에서 김정희의 실사구시론 내용은 두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하나는 정밀한 훈고를 구한다고 하는 것[精求訓詁]이고, 다른 하나는 몸소 행해 실천해야 한다는 것[實踐躬行]이다. 김정희보다 조금 앞서 홍석주(洪奭周)도 실사구시를 말하였다.
그의 실사구시는 청대 고증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고증학이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고증과 의리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찬가지로 공리공론만 일삼는 성리학의 이론에는 반대하며 무실(務實)과 실사(實事)를 강조하였다.
특기할만한 일은 홍석주의 실사구시론이 성리학과 고증학을 조화시키는 방향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성리학을 반대하고 고증학만을 추구하는 김정희의 실사구시론과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