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이후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 ·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 동몽교관 · 종부시주부 ·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 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선조 9) 봉화 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 · 경상도도사 · 충청도도사 · 형조좌랑 · 신녕 현감 · 영덕현령 · 전생서주부 · 공조정랑 · 상서원판관 · 금산 군수 · 단양군수 · 합천군수 · 장원서 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 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후 장악원정 · 사재감정 · 예빈시정 · 공조참의 · 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조목은 일찍이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평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이황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조목의 문집에는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이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힘썼으며,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의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조목은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 · 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다.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했고, 경학을 연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心學)에 심취하여 『심경(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았다.
외직에 부임했을 때에는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여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귀향할 때에는 역동서원(易東書院)과 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하고 겸양하며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 · 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月川集)』과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예천(醴泉)의 정산서원(鼎山書院),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봉화의 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