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남중(南仲), 호는 동애(東崖). 허비(許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훈(許薰)이고, 아버지는 의영고영(義盈庫令) 허원(許瑗)이며, 어머니는 김수온(金粹溫)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23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5년 저작을 거쳐 이듬해 박사·수찬을 역임한 뒤 사가독서하였다. 1531년 부교리가 되고, 응교·사간·검상·전한 등을 역임한 뒤 이조정랑이 되었다.
그러나 1534년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한 뒤 양근군수·황주목사 등의 외직으로 나갔다가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에 올랐다.
이듬해 이조참의를 거쳐, 1539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1541년 형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 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43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거쳐 이듬 해 우참찬이 되고, 1545년(인종 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 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로 전임되었다. 이어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과 함께 소윤으로서 대윤 윤임(尹任)의 제거에 가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으며, 좌참찬 겸 동지경연사를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
또한, 이듬해 좌찬성에 올랐으나 이기 등 강경파와 대립하면서 그들의 미움을 받아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49년(명종 4)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대윤 일파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가 유배된 민제인(閔齊仁)의 동생 제영(齊英)을 당진현감으로 임명한 일로 이기의 심복인 이무강(李無彊) 등의 탄핵을 받아 홍원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홍문관에서 무죄를 상주하자 명종이 관작을 복구시키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문집으로는 『동애유고』가 전하며, 시조 2수가 증손인 허목(許穆)이 편찬한 『선조영언(先祖永言)』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