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는 유학에서 도덕 판단의 합목적적·실천적 당위이자 정의, 의리로 해석되는 유교 용어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군자를 의리에 밝은 인물로 언급하였고, 맹자는 의를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순자는 의를 왕도를 실현하기 위한 도덕적 표준으로 보고, 총명한 군주가 잘 살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후 북송대 도학에 이르러 의 개념은 의리론이 전개되면서 도학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았다. 여말선초 시기, 도학을 계승한 학자들은 유학 도통의 계열을 이루며 절의론에 근거해 도학을 조선 사회에 전파하였다.
의(義)는 유학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지향해야 할 합목적적 당위성을 제시하는 보편적 기준이다. 선진 유학에서는 의를 종종 이(利)과 대조해 설명하였다. 『논어』에서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고 하였으며, 맹자는 양혜왕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법”을 묻자 “하필 이익을 말하는가?”라고 반문하며 의를 강조하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의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하였다. 그는 “약속이 합리적이면 실천할 수 있고,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고 하여, 의를 약속을 실행하도록 이끄는 합리적 기준으로 보았다. 또한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정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것이 용기의 척도임을 강조하였다. 공자에게 정의란 호오(好惡)나 가불가(可不可)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군자의 덕목이었다. 그는 “군자는 천하에 대해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고, 오직 의리와 함께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즉, 군자는 선입견 없이 오직 의(義)[정의로움] 기준으로 판단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에서 의는 이(利)와 함께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북송대 양시(楊時)는 의가 생물학적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보면서, “군자에게는 생명을 버리면서 의리를 취하는 것이 있다. 이익으로 말하면 사람이 욕구하는 것으로 생명처럼 심한 것이 없고, 미워하는 것으로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다. 누가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는가? 그가 깨우친 것은 의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맹자가 언급한 사생취의(捨生取義)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유학에서 의는 도덕적 실천의 합목적적 당위성을 의미하며, 사회적 규범으로서 예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맹자는 의가 사람이 걸어야 하는 바른 길이라고 하고 행위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삼았고, 그 알맹이를 형을 잘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의는 공경[敬]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공경은 형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므로 주1을 의의 본질로 삼았다. 그는 또한 의를 자신이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이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을 미워하는 감정으로서 수오(羞惡)의 마음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맹자는 도덕적 기상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하는데, 이것은 의와 도를 짝하여 반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호연지기는 기운의 일종으로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하는 실천 의지이자 도덕적 기상이라 할 수 있다.
『순자』에서 의는 왕도를 행하기 위해서 확립해야 하는 도덕적 표준으로서 명철한 군주와 어진 사람이 신중하게 가리고 힘써야 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의는 욕구로서 성(性)과 달리 성인이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사람이 배워서 할 수 있고 힘써 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의는 인위적인 노력과 실천을 통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순자는 사회적 정의와 공정성을 실현하는 관점에서 의를 해석하였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무리를 이룰 수 있는가를 자문하여 ‘직분[分]’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나눔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의리에 따라 직분을 나누면 조화롭고, 조화로우면 통일된다고 하였다.
『예기』에서는 의를 인(仁), 예(禮)와 연관하여 설명하거나 여러 덕목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인정(人情)과 연관하여 열 가지 인륜 관계의 덕목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예기』에는 “무엇을 인정이라고 하는가? 희로애구애오욕으로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인간의 의라고 하는가?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성스럽고, 형은 진실하고 동생은 우애로우며, 남편은 의리를 지키고 부인은 순종하며, 어른은 은혜롭고 어린이는 순종하며,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충성을 하니, 이 열 가지를 사람의 의리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북송대에 이르러 의는 도덕적 이념을 궁극 목표로 삼아 성인의 경지와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도통설의 한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도통설에 근거하여 북송대에 도학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정(二程)을 중심으로 장재, 소옹, 사마광은 긴밀하게 교류하였고, 정치적 · 학문적으로 동질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일종의 학술 군체, 정치 군체였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의리경학, 내성외왕, 만물일체관 등의 특징을 공유하며, 도통론의 문제의식을 확장해 성인들이 전수한 도위 본질과 그 체득 가능성, 성인에 이르는 길 등을 공유하였다. 여기에서 의리는 송대 도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핵심적인 가치였다.
이후 도학의 의리 개념은 여말선초에 이르러 절의(節義)라는 개념으로 진화되었다.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 김굉필(金宏弼) 등으로 이어지는 여말선초의 의리학파를 거쳐 완성된 조광조(趙光祖)의 도학 정신을 비롯해, 사육신의 절의 정신, 임진왜란 때 일본의 침략군에 항거한 조헌(趙憲) 등의 의병 운동, 외세에 항거해 일어난 동학운동, 조선 후기 일본 침략군에 대항한 의병 운동, 3·1운동과 민족독립운동, 4·19혁명 등이 모두 이러한 의 사상의 실천으로 이해된다.
유학의 의리관은 조선 후기와 개항기에 화서 이항로에 있어서 서양문물을 비판하는 위정척사사상으로 재생되었다.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에서 청과 서양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서양 문물을 반인륜적이고 저급한 물질문명으로 인식하며 배척하였고, 이를 우암 송시열의 의리론에 근거해 발전시켰다. 그는 “난세를 구제하는 길은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며, 이단을 물리치는 길은 정학을 밝히는 데 있고, 정학을 밝히는 길은 천리와 인욕을 분별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