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생관은 장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어느 한 시기나 관점에서만 말하기 어렵다. 이 사생관이 포괄하고 있는 문제는 죽음 후의 생명이 있는가, 그 영혼은 산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어떤 형태의 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는가 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나라에는 유교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사생관이 있고, 유교와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서민층까지 뿌리박힌 죽음과 사후(死後)의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생관은 어느 한 측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복잡한 중층적(重層的) 구조를 이루고 있는 전체를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1) 무속적 사생관 고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찍이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어서 죽은 자를 산 자와 더불어 동일하게 취급하며, 마치 죽음을 거부하는 듯 산 자의 현실 생활을 무덤 안에 재현해 놓은 사실을 볼 수 있다. 또 죽은 자의 시체를 매우 중하게 여긴 흔적도 보이는데, 무속적 관념에서 훼손된 시체에는 영혼이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사상에서 온 것이다. 『삼국지』「부여전」에 보면 죽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름에 얼음을 사용한 흔적도 보이고(其死, 夏月皆用氷) 있다.
부여에서는 이밖에도 장사지낼 때에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고 경건하게 했으며 일정한 종교적 의례가 있었는데, 중국의 장례 풍습과 비슷하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其居喪, 男女皆純白, 婦人着布面衣, 去環珮, 大體與中國相彷彿也). 순장의 풍습이나 지석묘(支石墓)의 종교적 기능으로 볼 때, 사람은 사후에도 현실의 생활과 비슷한 생을 누릴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한 듯이 보인다.
고대 우리나라의 샤머니즘에서 저승에 대한 관념이 얼마만큼 뚜렷한 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불교의 영향으로 뚜렷한 저승의 관념을 갖춘 것은 분명하다. 비록 고대의 저승 관념이 뚜렷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후에도 이 세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 어떤 형태의 한국적 계세사상(繼世思想)이 지배했다. 명계(冥界: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간다고 하는 세계)에서의 삶이 현세에서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는 관념은 사자(死者)가 거처하는 지역이 명당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이어진다. 사자가 묻히는 곳은 바로 그의 거주처가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민중왕(閔中王)은 전렵(田獵)하다가 한 석굴(石窟)이 있음을 보고 좌우 신하에게 자기가 죽거든 이곳에 묻히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한다(『삼국사기』, 민중왕 4년). 명당의 거주지에서 현세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자에 대한 제사를 끊임없이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사자와 생자가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사자의 안녕과 행복이 생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가변적인 현세 생활에 불변적인 연속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으로 파괴될 공동체의 유지를 방어할 사회적 장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근대의 무속적 관념에 따르면, 영혼에는 사령(死靈)과 생령(生靈)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사령은 죽은 뒤에 저승으로 가는 영혼이고,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속에 깃들여 있는 영혼이다. 사령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자료는 초혼제사(招魂祭祀) 때에 하는 ‘집가심’·‘진오기’·‘오구굿’·‘씻김굿’·‘해원(解寃)굿’·‘조상굿’ 등에서 망인(亡人)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생령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은 평안도 지역의 ‘다리굿’, 경상도 지역의 ‘산오구’가 있어서 육신에 깃들여 있는 영혼을 위해 제를 올리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민간에서는 잠자는 동안 꿈에서 영혼이 육신을 떠나 돌아다니는 것을 본다는 생각, 잠자는 사람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놓든가 종이로 얼굴을 덮어놓으면 잠든 사이에 육신을 떠났던 영혼이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관념도 있다.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으로 관념되는데, 모두 생령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사령은 또 조령(祖靈)과 원령(寃靈)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조령 즉 조상의 영혼은 이 세상을 순조롭게 잘 살다가 저승에 간 영혼인 선령(善靈)이고, 원령 즉 원귀(寃鬼)는 살아생전의 원한이 남아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도는 악령(惡靈)이다. ‘몽달귀신’·‘객귀(客鬼)’·‘영산’·‘수비’ 등이 모두 원귀들로, 요절하였거나 횡사한 사람,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원귀가 되기 쉽다. 그러나 비록 원귀라 할지라도 육신을 이탈한 무형·무멸·불가시적인 영적 존재라는 면에서는 선령과 다를 바 없고, 처음에는 원귀였지만 그가 품은 원한을 풀면 선령과 같이 저승으로 갈 수도 있다.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선령만을 모시지 않고 동일한 비중으로 악령도 모시고 있다. 그렇다고 선신과 악신의 구별 의식이나 가치 관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천수(天壽)를 타고났으면서도 그것을 다하지 못하게 한 악신에 패배하였기 때문이라는 가치관에서 잘 나타난다.
(2) 유교적 사생관 원래의 유교적 사생관이 어떤 것이었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밑바닥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죽은 조상이 죽었어도 산 사람과 하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끊임없이 가족들을 보호해 주고 가족 성원의 미래를 보살펴 준다는 것이었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비록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바로 그 곳에 있는 듯이 행한다. 즉, 모습 없는 가족으로서 가족들이 모인 곳에는 때와 장소에 매임이 없이 어디에나 편재(偏在)한다. 더욱이 사당에 모셔져 제례를 받는 동안에는 모습 없는 가족 성원으로서 산 사람과 동일한 대접을 받는다.
5대까지의 조상이 산 사람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3대조까지 가족 구성원으로 같은 공간 안에 머물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근본적으로 유교적인 효(孝)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부모나 조부모에게 바치는 효를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바치는 것이다.
상례(喪禮)에 수반된 효의 관념은 상례의 절차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입는 옷을 참최(斬衰)라고 하는데, 올이 굵은 삼베옷을 말한다. ‘참’이란 몹시 애통하다는 뜻이고, ‘최’란 효자의 슬픔을 말하는 것이니, 부모가 죽으면 효자의 마음이 황황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만큼 죄인의 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상례 초기에는 이른바 초혼[復]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자식으로서 부모 사랑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고 하늘에 비는 마음이지 공연히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중에 죽었다가 살아나는 자가 어쩌다 있는데, 이것은 혼이 위로 올라 가다가 형체를 사모하여 도로 집으로 돌아오려 하지만 사람들이 울부짖는 것을 두려워하여 편하게 돌아올 수 없다 한다.
이치로 따져 봐도 신도(神道)란 고요한 것을 좋아하므로, 초혼을 할 때에는 아들들이 잠시 곡을 그쳐서 혼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정성을 다한다. 유교적 합리주의로 보아 죽은 이의 소생이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규범에서 그것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식된 사람으로 부모가 죽은 다음 곧바로 성복(成服) 차림을 못하는 것도 효의 관념에서 우러나온다. 즉, 차마 자기 부모가 죽은 것으로 여길 수가 없어서 급작스레 성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효로 말미암아 상주들이 돌아가신 이를 삶의 영토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하고자 의도하는 것이다. 죽은 이를 가족 구성원으로 계속 머물러 있게 한 것으로, 죽었다고 하여 가족으로부터 내칠 수 없는 권위와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편, 부모를 죽게 한 것은 자식된 자의 죄업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부모를 죽게 한 것은 자식의 불효 탓으로 생각하고, 자식은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옛날 상례 절차에 따르면, 성복이 끝난 뒤에도 아들 상주들은 특별한 연고 없이는 밖에 나가지 못했으나, 마지못하여 출행할 때에는 못생긴 말에 무명 안장을 얹어서 탔다. 머리에는 방갓을 쓰고 생포로 직령(直領: 깃이 곧게 된 무관복의 웃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런 규정은 남에게 아들이 상주임을 보이기 위한 것도 되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죄지은 아들’이라는 관념이 깔려 있다.
또 습(襲)을 할 때에도 상주들이 짚 자리나 풀 자리에 앉았는데, 이것은 불효로 부모를 죽게 한 자의 죄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 죄의식이 과도하게 나타난 것은 삼년상의 기간 동안 꼬박 무덤 곁에 지은 초막에서 생활한 아들에게서 볼 수 있지만, 옛 사람들은 이런 아들을 하늘이 낸 효자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에는 열녀라는 특수한 관념도 발전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열녀의 이야기는 전국 도처에 세워져 있는 열녀를 추모한 비(碑)에서 잘 알 수 있고, 그에 대한 전설들이 많이 있다. 열녀는 자기의 잘못으로 남편을 죽게 만든 자책감에서 때로는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의 수단을 사용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도(婦道)를 저승에서 완성시킨 사람이다. 이와 같이 효와 열이라는 유교적 관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 밑바닥까지 스며든 것이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이승과 저승이 분리되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영원히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양쪽 공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고, 또 저승의 이야기를 이승의 것으로 우리의 삶 곁에 지극히 가까운 곳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양쪽을 쉽게 넘나들며 다리 구실을 한 존재가 조상이며 신들이다. 이 신들은 원칙적으로 죽은 이의 넋이지만, 그것은 사후에도 생시와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익히 알고 있고 영향을 미치면서 계속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 머묾의 장소는 집이요, 가족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승과 저승을 넘을 수 없는 단절 상태에 두지 않고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생사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 불교적 사생관 불교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심어준 신관(神觀)이나 사생관은 일찍이 한국 사상 가운데 없던 것들이 많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천신에 관한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를 하나의 실체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신, 객관적 개념으로 파악되는 신, 의지적 존재로서 인간 세계에 관여하는 신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무한히 광대하며 유일한 근원성을 말한다는 의미로 인식시켜 주었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一心)의 일(一)이란 대(大)를 뜻하며, 대는 무이(無二)·무소유(無所有)·이언절려(離言絶慮)하다고 표현하는 양식이 그러한 것이다. 어떤 형상·실체·성격도 없으면서 모든 것의 근원인 신 관념을 일깨워주었다.
이와 같이 보편적 생명관을 심어 주었는데,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sattva)라는 말은 생명 그 자체이며, 동시에 우주 창조의 근본 원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보통 사트바는 생류(生類)들을 뜻하는 말이나 넓은 뜻으로 오계(悟界)의 불(佛)·보살에 해당하는 말이다. 중생과 보살·불의 관계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보편적인 생명관을 불교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또 이 생명관에 못지않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상한 것은 극락왕생의 사상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승과 저승의 관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교만큼 뚜렷하게 설명해 준 것은 없었다. 극락왕생·정토왕생(淨土往生)·도솔왕생(兜率往生)·시방왕생(十方往生)·약사여래왕생(藥師如來往生) 등 명칭도 다양하게 이쪽 세상이 아니라 죽어서 저쪽 세상으로 가는 세계가 묘사되었다. 이 사상은 무속과도 결부되어 극락왕생에 도달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종교적 의례도 창안해 냈다.
그밖에 인과응보의 관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시대에 처음 받아들인 불교의 성격이 인과응보 사상과 구복 신앙으로서의 불교였다는 점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뿌리 깊이 들어 있는 관념이었다. 이 세상에서 지은 업은 반드시 저 세상에서 그 업보를 받으며, 심지어 이 세상에서 저지른 악한 영향을 남기고 간 사람의 후손에게까지 그 결과가 미쳐 결국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과응보에 얽힌 민간 신앙적 설화는 대체로 이런 점을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사생관을 이야기할 때 어느 한 측면만 가지고 말해서는 안 되고, 무속적·유교적·불교적 관념이 남긴 것 전부를 살펴보아야 하며, 여기에 덧붙여 현세의 행복과 불로장생에 얽혀 있는 도교적 관념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과 사후의 세계 저쪽보다는 현세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생관을 가졌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