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은 조선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09년(태종 9)에 태어나 1474년(성종 5)에 사망했다. 최충의 증손이다. 1434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8년 동안 집현전 관원으로 유교적인 의례와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 때에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세조가 즉위할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무정보감』을 찬수하였으며 『세종실록』·『예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이 해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어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박팽년 · 신숙주 · 이개(李塏)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445년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 · 『훈민정음해례』 등을 찬진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5등으로 급제,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세종은 세자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했는데 이 때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정치에 보좌함이 컸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고, 같은 해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해 7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석하는 일을 맡았으며, 『고려사』의 열전을 집필하였다. 1452년 2월 『세종실록』 편찬 때는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협찬한 공이 있다 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가 되었다. 이 해 12월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454년 10월에는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章)을 지어 올렸으며, 1455년 정난공신 1등의 교서가 내려졌다.
그 해 2월 대사헌이 되고, 6월에 세조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7월에 서연의 우부빈객이 되었고, 그 뒤 호조참판 · 이조참판 · 형조판서 ·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세조는 즉위한 직후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 그는 김국광(金國光) · 한계희(韓繼禧) 등과 함께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으로 임명되었고, 1458년(세조 4)에 『신육전(新六典)』의 초안을 작성하여 올렸다.
그 해 부친상을 당했으나 왕명으로 기복(起復)되어 다음 해 중추원사세자빈객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46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 간행하였다.
1463년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464년 9월 왕명으로 『병장설주(兵將說註)』를 산정(刪定)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겸 세자이사(左參贊兼世子貳師)가 되었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였다.
1466년에 판병조사로 임명되자 그는 군사 관계는 적임이 아니라며 간절히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67년 4월 좌찬성, 5월 우의정, 7월 좌의정, 9월 영의정이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9월 신숙주 · 한명회(韓明澮) · 김국광 등과 함께 원상이 되었다. 1469년 경국대전상정소 제조(提調)를 겸하여 『경국대전』을 찬진했고,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하였다.
1470년(성종 1) 부원군에 봉해졌고, 『역대제왕후비명감(歷代帝王后妃明鑑)』을 찬진하였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녹훈되고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연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세종실록』 · 『예종실록』을 찬진하였다. 그 뒤 1474년 4월에 죽었다.
그는 18년 동안 집현전 관원으로 있으면서 경연관 · 지제교(知製敎)로서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례 ·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고제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서거정이 찬한 비명, 『필원잡기(筆苑雜記)』, 김육(金堉)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의 것과 『성종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그의 성품이 겸공(謙恭) · 간정(簡靜) · 단개(端介) · 무화(無華) · 공정(公正)하고 정관(正冠) · 위좌(危坐)하며, 침착 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청백하여 재산을 탐하지 않으며, 40년 간 벼슬했으나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겸근과언(謙謹寡言)과 정관 · 위좌하였다고 한 것은 거의 비슷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성이 없고,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인사(人事)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문형(文衡)에 있던 사람이 의정으로 임명되면 반드시 문형직을 사양하는 것이 예였는데 그는 오히려 사양하지 않고 겸했다고 못마땅하게 평하고 있다. 특히, 가정 문제에서도 부인의 성품이 사나워서 집안일은 부인의 주장대로 행해져 자유가 없었다고 하고, 혼사에 있어서도 인품이 아닌 재산만을 보고 사위와 며느리를 얻었다고 혹평하고 있다.
『성종실록』 졸기에 보이는 이와 같은 혹평은 당시 삼사(三司) 계통에 진출하여 훈구대신들을 공격하던 사림(士林) 계통의 신진 관료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서로 『태허정집』 ·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