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 『고려사』의 개찬(改撰), 『동국정운』·『경국대전』·『동국통감』 등의 찬수, 세종부터 예종까지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당시의 문호였다.
최항의 아들 최영린(崔永潾)·최영호(崔永灝)가 자료를 수집하다가 죽자, 처남인 서거정(徐居正)이 이를 이어 1486년(성종 17) 편집을 끝내고 간행하였다. 그 뒤 1569년(선조 2) 증손 최흥원(崔興源)이 경상도도사로 있으면서 경상우도수영(慶尙右道水營)에서 중간하였다. 그러나 그 중간본이 잘못된 곳이 많아 7대손 최온(崔薀)이 1625년(인조 3)에 필삭(筆削)·증손(增損)을 가해 다시 간행하였다. 1707년(숙종 33) 8대손 최정현(崔鼎鉉)과 9대손 최시옹(崔是翁) 등이 이를 다시 중간하였다. 권두에 서거정의 서문, 권말에 최흥원의 구간기사(舊刊記事), 최온의 간기(刊記), 최시옹의 발문이 각각 있다.
2권 2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이 책은 일반적인 문집 체계와는 달리 맨 앞에 저자의 묘비명과 묘지문이 있고, 이어 권1에 시 218수, 권2에 서(序) 12편, 기(記) 5편, 발(跋) 3편, 서(書) 1편, 표(表) 7편, 전(箋) 13편, 소(疏) 5편, 제문 3편, 찬(贊) 12편, 비명(碑銘) 2편, 보유(補遺)로 계몽요해발(啓蒙要解跋)·사예부군행적(司藝府君行蹟)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에는 일본의 국사(國師)나 승려를 상대로 한 것이 많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신숙주(申叔舟)를 증별(贈別)한 것도 있다. 문(文)은 대개 왕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특히 조선 초기 명(明)과의 관계를 살피는 데 참고가 되는 글들이 많다. 그 가운데 「어제유장설서(御製諭將說序)」와 「명황계감서(明皇誡鑑序)」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의 입장에서 왕과 장수가 지켜야 할 것들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기의 「기영회기(耆英會記)」는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자로서 70세가 넘은 기로(耆老)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자리에서 성종이 불교정책과 혼인제도에 있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풍속에 대해 시정책을 물은 데 답한 글이다. 「십이준도찬(十二駿圖贊)」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껴 기르던 12마리의 준마(駿馬)에 대해 지은 글이다. 서(序)와 함께 그 문세가 웅건하고 발랄해 흥미를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