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학자·의병·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서산집』, 『보인계첩』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850년(철종 1) 친명(親命)으로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하였다. 1851년 『학봉집(鶴峯集)』을 중간하고, 그 이듬해에는 『가례의(家禮儀)』를 편성하였다. 1854년 「졸수요결(拙守要訣)」과 「입학오도(入學五圖)」 및 「주일설(主一說_」을 지었다. 「입학오도」에서는 학문의 대요가 입지(立志)·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의 네 가지에 불과하다고 역설하였다.
1867년(고종 4) 어사 박선수(朴瑄壽)가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인릉참봉(仁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사옹원주부(司甕院主簿)·경상도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878년 집 서쪽 복병산(伏屛山)에 서산재(西山齋)를 지었다. 1882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1889년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을 회교(會校)하였다.
1894년 7월 승정원우부승지에 오르고 이 해 8월 영해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한말 영남의 대유학자로 이돈우(李敦禹), 권연하(權璉夏)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자·의병·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사후 소계서당(邵溪書堂)에 입향되었으며, 저서로 『서산집』 16책(본집 13책, 속집 3책)이 있다. 이 밖에 김흥락의 문하에 출입했던 문인 705인이 등록된 『보인계첩(輔仁稧帖)』이 있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서산전집(西山全集)』
- 『한사경(韓史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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