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서(汝鋤). 아버지는 제학(提學) 권우(權遇)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판사(判事) 홍빈(洪贇)의 딸이다. 또한 조선 초기 유학의 대가인 권근(權近)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으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다. 1417년(태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25년(세종 7) 집현전수찬에 임명되었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다.
그 해에 비첩(婢妾)을 학대한 죄로 부처(付處: 정해진 장소에 머물도록 하는 형벌)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었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유능한 문신(文臣)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힘쓰도록 한 제도)하고, 1433년 대사성이 되어 송조고사(宋朝故事)에 따른 과거제도의 개선책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143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고, 다음 해 우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유호통(兪好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 등과 함께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을 편찬, 간행했다. 그 해에 우승지가 되었으나 40세로 죽었다. 시문과 경학에 뛰어나서 세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며, 『작성도(作聖圖)』를 저작하였다. 시문으로 당시 그의 종형인 권제(權踶)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