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천의·천도·천심 등은 모두 같은 천의 작용이지만, 이 작용이 마치 명령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라는 의미에서 천명,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라는 의미에서 천도, 사람의 의지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의, 사람의 마음과 같다는 의미에서 천심이라 한다.
선진 유학(先秦儒學)에서 창조자로서의 천은 ≪시경≫의 ‘천생증민(天生蒸民)’, ≪좌전≫의 ‘천생민이수지군(天生民而樹之君)’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직접 인간을 창조하는 자로 표현된다. 하지만,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에서 본다면 천의 명(命)이 인간의 존재 원리로서 인간에 내재하는 것으로 되어, 천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계로 전환한다.
이에 대해 송대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희(朱熹)는 “하늘이 음양오행을 갖고 만물을 화생(化生)하는 데 기(氣)로써 형(形)을 이루고 이(理)가 거기에 부여되는 것이 마치 명령에 의한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천명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주희는 또한 “부귀사생(富貴死生)과 화복귀천(禍福貴賤)은 모두 태어나면서 결정된 것”이라며 만물의 창조 원리로서의 천명 외에 운명의 의미로서의 기품(氣稟)의 천명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의 천명은 만물의 창조 원리와 운명이라는 두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 한국 유학에서는 천과 인의 관계가 천인무간(天人無間)으로 표현됨으로써 천과 인이 매개체가 없이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유학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에 이르기까지는 천인 관계가 주로 관심 대상이었고, 이황 이후에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이동 문제(異同問題)가 관심의 주대상이었다.
이황과 동시대의 학자인 정지운(鄭之雲)은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지었는데, 이황이 이를 수정함으로써 그 내용을 둘러싸고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 논변(四端七情論辨)을 벌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