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그는 13세인 1560년에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서(四書)와 『근사록』 등을 배웠고, 20세인 1567년에는 황해도 해주로 찾아가 이이(李珥, 1536~1584)의 문인이 되었다. 특히 이이로부터는 성리학 분야에서, 송익필로부터는 예학 분야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목판본으로, 10권 7책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김장생은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와 『경서변의(經書辨疑)』 등 성리학 관련 저술도 남겼지만, 그의 대표적 업적은 예학에 집중되어 있다. 부친의 상중에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하였고, 1599년에는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으며 이는 1685년에 간행되었다. 『의례문해(疑禮問解)』는 그의 사후인 1646년에 아들 김집(金集, 1574~1656)의 주도로 간행되었다. 『상례비요』와 『의례문해』는 행례(行禮)의 현장에서 요구되는 예의 다양한 내용들을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 또는 편찬되었다면, 『가례집람』은 철저하게 『가례(家禮)』에 등장하는 내용들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김장생은 이 3종의 예서를 남김으로써 한국 예학의 종장으로 평가받았다.
『가례집람』의 구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례』의 「도(圖)」와 관련한 36개의 표제어, 「서(序)」와 관련한 31개의 표제어, 「통례」는 4항목에 표제어 281개, 「관례」는 3항목에 표제어 99개, 「혼례」는 8항목에 표제어 132개, 「상례」는 29항목에 표제어 784개, 「제례」는 7항목에 표제어 148개를 제시하는 등 총 1,511개의 『가례』 관련 표제어를 제시하고 이에 관한 고증(考證)과 보정(補正)을 하였다.
『가례집람』이 제시한 『가례』에 대한 고증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가례집람』은 『가례』에 등장하는 글자와 단어 그리고 문장에 이르기까지 『가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꼼꼼하게 표제어로 제시하고 이에 대한 고증 작업을 진행했다. 둘째, 해당 예문이나 예제에 대하여 예법에 관한 책이나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를 경우, 『가례집람』은 이를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견해들 간의 우열을 평가해서 취사를 판단하였다.
『가례집람』은 『가례』에 대한 고증에 머물지 않고 보정(補正)까지 진행했다. 예를 들면, 구준(丘濬, 1421~1495)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서 제기한 「가례도」의 문제점 6가지 외에 「가례도」가 『가례』 본문과 부합하지 않은 14가지를 추가로 제기한 것이나, ‘사당전도(祠堂全圖)’에서 정자각(丁字閣) 형태의 사당도를 제안함으로써 『가례』의 부정합한 점을 보완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가례집람』은 『가례』에 나오는 오복(五服)의 기간에 관한 역대의 연혁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이해를 도운 「오복연월역대연혁(五服年月歷代沿革)」을 제공하였는가 하면, 『가례』의 틀린 글자나 빠진 내용을 수정한 것은 물론 「가례도」 중에 ‘행관례도(行冠禮圖)’를 「장자관례도(長子冠禮圖)」와 「중자관례도(衆子冠禮圖)」로 구분하여 재구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의 『가례』 연구가 행례의 매뉴얼을 마련하는 단계에서 『가례』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단계를 지나 고증의 차원으로 접어들었던 것이 16세기 후반까지의 경향이었다. 『가례집람』은 그 성과물이자 『가례』를 보완하고 수정하는 차원으로 진전시킴으로써 17세기 이후 진행될 『가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