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집고』는 18세기 김종후가 『가례』와 관련한 고금의 자료를 정리하여 엮은 예법에 관한 책이다. 『가례』의 체제에 따라 저술되었지만, 『가례』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는 16세기 이후 『가례』에 대한 조선의 예학적 성과의 연장선에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18세기의 예학적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사마광의 『서의』를 충실하게 반영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김종후(金鍾厚, 1721∼1780)의 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본암(本庵)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목활자본으로, 8권 8책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가례(家禮)』 연구는 시기별로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면서 발전했다. 16세기에는 수준 높은 예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예에 관한 다양한 문답류(問答類)들이 양산되었고, 그와 동시에 훈고와 고증의 방법으로 『가례』의 의미를 명료화하려는 주석서들이 저술되었다. 17세기에는 체재와 내용의 측면에서 훨씬 충실한 행례(行禮) 지침서들이 만들어졌고, 언해서들이 등장하였으며, 의례(疑禮)와 변례(變禮)에 관해 독자적으로 정리하고 논증한 예법에 관한 책들이 출현하였다. 18세기가 되면 행례와 고증 그리고 변례와 관련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예서들이 학파별로 간행되는데, 『가례집고』 역시 이와 같은 18세기 『가례』 연구의 흐름 안에서 저술되었다.
『가례집고』의 간행은 김종후 사후 21년만인 1801년, 제자 임육(任焴)에 의해 완성되었다. 임육은 예학의 대가였던 이재(李縡, 1680∼1746)의 제자인 임성주(任聖周, 17111788)의 족질이며, 임성주는 김종후와 많은 예학적 주제에 관해 토론을 주고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실제 간행 과정에서 주요 실무를 주도한 인물은 또 다른 제자인 이광석(李光錫)이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9촌 조카였던 그는 서얼 출신이었지만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가례집고』의 간행뿐 아니라 편찬 과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김종후는 『가례집고』에 이광석의 견해를 115건이나 인용하였다. 이광석이 중간에 사망함으로써, 임육이 『가례집고』의 간행을 마무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례집고』는 『가례』의 체제에 따라 편찬된 7권의 본문과 부록 1권을 포함하여 총 8권 8책으로 구성되며, 앞에 김종후의 「서」와 마지막에 임육의 「발」이 실려 있다.
『가례집고』는 기본적으로 『가례』의 체제를 따랐지만, 세부적으로는 고례(古禮)의 경, 전과 주, 소 및 중국과 조선의 관련 예설을 반영하고 해당 조목의 말미에는 저자의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가례집고』의 연구사적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책이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를 『가례』 연구의 토대로 인식하고, 「서의고이(書儀考異)」를 통해 『서의』와 『가례』의 내용을 하나하나 축자적 대조 방식으로 정밀하게 비교하고 분석하였다는 사실이다.
『가례집고(家禮集考)』는 김종후가 저술한 18세기 대표적인 예서로,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유계(兪棨, 1607∼1664)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등을 계승하는 예서로 평가받는다.
조선의 예학이 발전하면서, 16세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가례』의 불완전성을 고례를 통해 보완하려는 조선 학자들의 연구 성과도 축적되었다. 『가례집고』 역시 이러한 당시 조선 예학의 학술적 분위기에서 저술되었다. 특히 노론인 서인계 학자들에게 김장생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예설은 상당한 권위를 획득하였다. 김종후 역시 당시 대표적인 노론계 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장생과 송시열의 예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였다. 김종후는 노론이었지만, 예학과 관련해서는 학파를 넘어 폭넓은 교류를 지향했다. 대표적으로 낙론계의 임성주와는 고례를 기준으로 하는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예설을 공유하였고, 소론계의 박세채(朴世采)와도 교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