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姜碩期, 1580∼1643)의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 및 삼당(三塘)이며, 본관은 금천(衿川)이다.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삼았다.
활자본으로, 2권 2책이다.
강석기의 『의례문해』는 1638년 이전에 강석기가 편찬한 것을 그의 5대손인 강명달(姜命達)이 1772년 『월당집(月塘集)』을 활자본으로 간행할 때 별집으로 수록하였다. 이 책의 첫머리에는 신익성이 쓴 서문과 목록이 있고, 이어서 본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끝에 정홍명(鄭弘溟)이 쓴 발문이 실려 있다.
『의례문해(疑禮問解)』는 모두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례』의 체제에 맞게 통례(通禮),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의 순으로 129조목에 달하는 질문과 해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75조목이 김장생의 『의례문해』에도 실려 있다.
『의례문해』라는 제목의 책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김장생(金長生)이 그의 지인 또는 제자들과 의심스러운 예문(禮文)이나 변례(變禮)적 상황 등 이른바 ‘의례(疑禮)’와 관련하여 강론한 자료로 「습유」를 포함한 548항목을 사후에 편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장생의 제자인 강석기(姜碩期)가 관혼상제를 의미하는 사례(四禮)와 관련하여 의심스러운 부분을 스승에게 질문하여 답을 얻은 다음 이를 정리해서 엮은 것이다.
같은 이름의 책이 스승인 김장생과 제자인 강석기의 이름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김장생의 『의례문해』가 먼저 만들어지고, 강석기의 『의례문해』가 나중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김장생의 『의례문해』가 1643년에 아들 김집(金集)에 의해 처음 교정이 되고 3년 후에 간행된 데 비해, 강석기의 『의례문해』에 대한 서문이 신익성(申翊聖)에 의해 쓰인 것이 1638년이다. 이런 점들을 반영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강석기의 『의례문해』가 김장생의 『의례문해』보다 먼저 편찬된 것이다.
16세기 조선의 예학은 영남 지역의 퇴계학파가 선도하였고, 이후 17세기로 접어들면서 김장생이 퇴계 예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기호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예학적 주류를 형성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조선만의 예학적 의제들을 제기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토론과 문답이 이루어졌고, 이것을 정리하는 예법에 관한 책들이 만들어졌다. 강석기의 『의례문해』는 이런 분위기에서 만들어졌고, 김장생의 문하에서는 강석기를 포함한 제자들과 답문을 주고받은 김장생의 예설들을 모아서 엮은 김장생의 『의례문해』를 편찬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