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팔모(三父八母)는 상복(喪服) 제도와 관련하여 『가례(家禮)』에 수록된 특수한 형태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형을 이르는 말이다. 전통 시대에는 죽은 사람에 대한 산 사람의 슬픔을 표하는 도리를 상복(喪服)의 종류와 기간으로 정하였다. 이 가운데 특별한 관계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어떤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는 3종의 특별한 아버지와 8종의 특별한 어머니를 선별하고 이들에 대한 상복 제도를 제시하였다.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는 <대종오복지도(大宗五服之圖)>를 포함하여 상복(喪服) 제도와 관련한 여러 개의 도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삼부팔모복제지도(三父八母服制之圖)>가 있다. 여기에 실린 ‘삼부(三父)’와 ‘팔모(八母)’는 누구이며, 이들에 대한 상복 제도는 어떤 것인지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부(三父)」 ① 동거계부(同居繼父): [관계] 어렸을 때 재가(再嫁)한 어머니를 따라가서 함께 산 계부. [의의] 의복(義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부장기(不杖期). 단, 계부와 본인 상호 간에 대공(大功) 이상의 친족이 없는 경우에 한함. ② 부동거계부(不同居繼父): [관계] 어렸을 때 개가(改嫁)한 어머니로 인해 계부로 삼았지만, 장성한 뒤 분가하여 헤어져 산 계부. 또는 계부에게 자식이 있거나 본인에게 대공(大功) 이상의 친족이 있는 경우. [의의] 의복(義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삼월(三月). ③ 원부동거계부(元不同居繼父): [관계] 어머니가 개가할 때 따라가지 않아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계부. [의의] 해당 사항 없음. [상복 및 기간] 해당 사항 없음.
「팔모(八母)」 ①적모(嫡母): [관계] 첩의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정실 부인. [의의] 정복(正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삼년(三年). ②계모(繼母): [관계] 아버지의 재취(再娶) 정실 부인. [의의] 의복(義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삼년(三年). ③서모(庶母): [관계] 아버지의 첩 가운데 아들을 낳은 분. [의의] 의복(義服). [상복 및 기간] 시마(緦麻) 삼월(三月). ④자모(慈母): [관계] 아버지의 명으로 어머니 없는 서자를 돌봐 준 아버지의 첩.(단, 다른 자식이 없는 첩이어야 함.) [의의] 의복(義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삼년(三年). 단, 아버지의 명이 없었다면 소공(小功) 오월(五月). ⑤유모(乳母): [관계] 어렸을 때 젖을 먹여 키워 준 분. [의의] 의복(義服). [상복 및 기간] 시마(緦麻) 삼월(三月). ⑥양모(養母): [관계] 동종(同宗) 또는 3세 이전에 버려진 자기를 길러 준 분. [의의] 정복(正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삼년(三年). ⑦출모(出母): [관계] 아버지에 의해 쫓겨난 어머니. [의의] 강복(降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부장기(不杖期). 단, 아버지의 대를 이은 자식은 상복을 입지 않음. ⑧가모(嫁母): [관계] 아버지가 죽은 뒤에 재가(再嫁)한 어머니. [의의] 강복(降服). [상복 및 기간] 자최(齊衰) 장기(杖期). 단, 아버지의 대를 이은 자식은 상복을 입지 않음.
‘삼부’와 ‘팔모’에 관해서는 조선시대 예학사에서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예를 들면, ‘팔모’ 중 ‘적모(嫡母)’에 대한 서자의 복이 ‘의복(義服)’이어야 할 것 같다고 본 최신(崔愼, 16421708)은 “「가례도」에서는 이를 정복(正服)이라고 하였으나 『가례』 본문에는 관련 내용이 없다.”라고 하면서 이것도 혹시 「가례도」의 오류가 아닌지 의심했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삼부팔모설(三父八母說)」에서 이것의 문제점을 여러 각도에서 지적하면서 현재의 『가례』가 주자의 수정본(手定本)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고, 「독가례(讀家禮)」에서는 “삼부팔모도(三父八母圖)는 원대(元代)에 편입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삼부팔모’에 관한 설이 원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처음 제기한 것은 『독례통고(讀禮通考)』를 지은 청대(淸代)의 예학자 서건학(徐乾學, 16311694)이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독례통고』의 문제점에 관한 메모를 책으로 엮은 「예고서정(禮考書頂)」에서 “삼부와 팔모는 의리가 각각 달라 비교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것이 하나의 틀 속에 묶일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렇게 조선시대 예학에서는 ‘삼부팔모’에 관하여 여러 측면에서 문제 제기를 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병자호란 이후 환향녀(還鄕女)에 대한 인식을 ‘팔모’에 속하는 ‘출모’나 ‘가모’와 관련지어 바라보았던 사례이다. 출모와 가모는 아버지와의 의리가 끊어진 어머니라는 점에서 은혜와 의리가 상충되는 대상이었고, 그만큼 예의 실천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조선에서 출모 및 가모와 관련한 논쟁이 격화된 것은 병자호란 당시 포로로 잡혀갔던 피로부녀(被擄婦女)와의 이혼 문제나 그 자손들의 관직 진출 규제를 두고 많은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당시 이들의 복제에 관한 담론만큼은 원론에 입각하여 극히 보수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이 문제가 종법(宗法) 제도와 가부장제를 흔들 수 있고 나아가서는 체제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층에서는 자체적으로 피로부녀를 출처(出妻)로 다루는 과정을 통해 특권 집단의 도덕과 의리를 재확인하고, 자신들의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피로부녀들은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남편과 의리가 끊어진 가모나 출모로 간주되었고, 이후 예제(禮制)의 재정비가 강조되면서 가모 및 출모에 대한 차별적 예제가 더욱 구체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