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제옹(濟翁). 홍척(洪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정(洪淀)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암군수(行靈巖郡守) 홍임(洪任)이며, 어머니는 허손(許蓀)의 딸이다.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熙嬪洪氏)가 딸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를 거쳐 1504년 지평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1506년(중종 1)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을 도모하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으며, 동부승지에 올랐다. 곧 이어 도승지에 오르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이듬 해에는 견성군(甄城君: 성종의 아들)을 옹립하려던 이과(李顆)의 난을 다스린 공로로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정난공신은 1517년 3월에 노영손 외에 모두 삭훈되었다
이어 병조판서에 올라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해 경연에서 국사를 논의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로 잠시 옮겼다가, 호조판서·좌참찬·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해서 정부 요로에 대거 등용된 사림들이 훈구세력을 비판하며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1516년 그는 정국공신의 명단을 개정하는 척하면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하였다. 당시 남곤·심정 등은 홍경주의 딸 희빈이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화로 조광조를 모략하였다. 그리고 홍경주는 훈구세력을 대표해 조광조의 일파를 처형해야 한다고 밀고했던 것이다.
이때 죽은 사람을 후일 기묘명현이라 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을 다시 역임하고, 1521년 이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도열(度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