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주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판중추부사,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제옹(濟翁)
시호
도열(度烈)
이칭
남양군(南陽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21년(중종 16)
본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주요 관직
판중추부사|좌찬성|이조판서
관련 사건
중종반정|이과의 난|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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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판중추부사,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제옹(濟翁). 홍척(洪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정(洪淀)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암군수(行靈巖郡守) 홍임(洪任)이며, 어머니는 허손(許蓀)의 딸이다.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熙嬪洪氏)가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를 거쳐 1504년 지평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1506년(중종 1)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을 도모하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으며, 동부승지에 올랐다. 곧 이어 도승지에 오르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이듬 해에는 견성군(甄城君: 성종의 아들)을 옹립하려던 이과(李顆)의 난을 다스린 공로로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정난공신은 1517년 3월에 노영손 외에 모두 삭훈되었다

이어 병조판서에 올라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해 경연에서 국사를 논의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로 잠시 옮겼다가, 호조판서·좌참찬·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해서 정부 요로에 대거 등용된 사림들이 훈구세력을 비판하며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1516년 그는 정국공신의 명단을 개정하는 척하면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하였다. 당시 남곤·심정 등은 홍경주의 딸 희빈이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화로 조광조를 모략하였다. 그리고 홍경주는 훈구세력을 대표해 조광조의 일파를 처형해야 한다고 밀고했던 것이다.

이때 죽은 사람을 후일 기묘명현이라 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을 다시 역임하고, 1521년 이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도열(度烈)이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기묘록(己卯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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