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은 조선전기 홍문관 교리, 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49년(세종 31)에 태어나 1506년(중종 1)에 사망했다.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했고, 자신의 두 아들도 왕실의 사위로 들였다. 중국말에 능통해 관압사·선위사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승문원에서 중국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종의 총애를 업고 유자광과 손잡고 도승지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된 뒤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손잡고 생모 윤비가 죽은 내막을 밀고해 갑자사화를 일으켰고, 1506년 중종반정 때 처형되었다.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임사의(任士毅). 자는 이의(而毅). 임거경(任巨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견(任肩)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임원준(任元濬)이며, 어머니는 남규(南珪)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 · 승지 · 도승지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중국말에 능통해 관압사(管押使) · 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477년(성종 8) 서얼 출신인 유자광(柳子光)과 손을 잡고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해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도승지 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김언신에 이어 유자광도 현석규를 공척(攻斥)하는 소를 올리자, 성종은 이를 붕비(朋比)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구원 상소가 계속되었으며, 이듬 해 4월 홍문관부제학 유진(兪鎭), 예문관봉교 표연말(表沿沫), 종실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 등의 잇따른 상소에서 임사홍의 사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 유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 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성종조에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재기해 사화를 주도하였다.
유자광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金宗直) ·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계열에 보복을 가했고, 그는 1504년 갑자사화를 주도해 훈신 계열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즉,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제휴해 연산군의 생모가 죽은 내막을 밀고해 폐비사사(廢妃賜死) 당시의 중신들을 타도하고, 사림계 인사들에게도 다시 화를 입혔다.
그의 아들 임희재(任熙載)는 김종직의 문하가 되어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으며, 그는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