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는 ‘교수관’이라 칭하였고, 유학교육을 담당하였다. 4학에는 각기 2인의 교수를 두었으나, 성균관의 전적(典籍)으로 겸임하게 하였다.
목(牧) 이상 고을의 향교에는 문과 출신 관원으로, 도호부의 향교에는 생원·진사 중에서 각 1인씩을 임명하게 하였다. 교수의 명칭은 1390년(공양왕 2) 부·목의 향교에 교수관을 파견한 데서 처음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교수로 통칭되다가 ≪경국대전≫에서 교수로 고정되었다.
경기에 11인, 충청도에 4인, 경상도에 12인, 전라도에 8인, 황해도에 6인, 강원도에 7인, 함경도에 13인, 평안도에 11인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중기 이후 향교교육이 피폐하면서 훈도(訓導)와 함께 폐지되었다.
임무는 향교의 생도를 가르치고 수령을 보좌하기도 하는 것이었으나, 문과급제자들이 지방에 가는 것을 기피하여, 문과 초시에 일곱번 합격한 자나 생원·진사 가운데에서 임명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