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는 조선시대 6품직 교관직을 통칭하는 관직명이다. 사부학당에는 성균관의 정6품 교관인 전적이 사학교수의 직책을 겸임하였으며. 부와 목 등 지방의 큰 고을에는 종6품직 교수가 파견되었다. 중앙관청의 각 관아에도 교육과 실무를 담당하는 교수직이 있었는데, 호조의 산학교수, 사역원의 한학교수, 형조의 율학청의 율학교수, 혜민서의 의학교수, 종학의 종학교수 등이 이에 속하며 모두 종6품직 교관이었다.
오늘날 교수는 대학의 전임교원들을 뜻하지만, 역사적으로 고려나 조선시대 교수는 관학(官學)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의 명칭이었다. 조선시대 법전을 기준으로 보자면, 교수직은 6품직 관원이다.
조선 전기 사부학당에는 교수와 훈도(訓導)를 각 2원씩 두었는데, 교수는 성균관의 전적[정6품]이, 훈도는 성균관의 7품칙 이하 학관이 겸임하였다. 지방의 경우, 목(牧) 이상의 고을에는 문관 출신 종6품 교수가 파견되었으며, 군현에는 종9품직 훈도가 파견되었다. 명종대 이후 지방 향교의 교관 중 훈도는 혁파되지만, 교수는 문관이 계속 파견되었으며, 조선 후기 자료에서도 그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 향교의 교관인 교수와 훈도제는 지방 교육 체제의 변화와 관직 제도 운영의 실제를 고찰하면서 그 제도의 실상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훈도제의 경우, 명종대 이후 선조를 거치면서 중앙정부의 훈도가 혁파되었는데, 이러한 조치의 이면에는 지방 교육 정책의 중요한 변화가 담겨져 있다. 16세기 중엽 이후 훈도가 파견되지 않는 군현에서는 그 고을의 수령이 지방의 생진들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를 추천하고 관찰사가 관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차임되었다. 따라서 훈도제의 혁파는 향교의 교관 제도를 중앙집권적 방식에서 지방자치적 방식으로 이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중종대를 거치면서 지방 큰 고을에 피견되었던 교수들은 무록관(無祿官)이었지만, 지방 관아의 재정으로 그들의 일상업무와 생활을 지원하였다. 지방 교수들이 녹(綠)이 없는 관직이었다는 사실은 지방 교육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의 약화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제도의 실제를 조사해보면, 도목정사에서 관원 평가를 낮게 받았거나 여타의 과실들으로 실직을 얻지 못한 관원들에게 실직을 보장하는 자리였으며, 이후 사판(仕版)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관직이었다는 점에서 모든 관원에게 기피되는 자리였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16세기 이후 지방의 교수 제도의 운영은 무록관 제도와 지방교육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속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잡학에 속하는 여려 학문은 이를 필요로하는 해당 관청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각 기관에도 교수를 두고 생도들을 교육시켰다. 호조의 산학교수(算學敎授), 사역원의 한학교수(漢學敎授), 형조 율학청의 율학교수(律學敎授), 혜민서의 의학교수(醫學敎授), 종학의 종학교수(宗學敎授) 등이 이에 속하며 모두 종6품직 교관이었다. 따라서 이들 교수직에 대한 연구는 조선시대 산학, 의학, 한학, 율학, 종학 등의 실제와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교관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