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창원 출생. 사옹원정 조치우(曺致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조효연(曺孝淵)이고, 아버지는 증좌참찬 조윤신(曺允愼)이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중우(仲羽)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5년(선조 8)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그를 검독(檢督)에 임명, 한정(閑丁) 50명을 독납(督納)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하여 다음해 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청으로 풀려나와 금오랑(金吾郎)에 특별 임명되어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중화로 달려갔다. 그 뒤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軍民)을 규합, 중화 · 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이어 형조정랑 ·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되고, 1593년 평양싸움에 참가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 뒤 대구부사 · 성주목사 · 안주목사 ·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선산부사, 1606년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지산집』 ·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 『가례고증(家禮考證)』 · 『주역석해(周易釋解)』 · 『역상추설(易象推說)』 · 『논위학지요(論爲學之要)』 · 『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 ·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 『소황이두시가구주(蘇黃李杜詩家句註)』가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었으나,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