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상 우리나라에 산학제도가 성립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일이다. 『삼국사기』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산학박사(算學博士) 또는 조교 한 사람에게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을 교수시킨다.”고 기술하고 있다.
교수과목 중 『철경』·『구장』은 각각 철술(綴術)·구장산술(九章算術)을 가리켰다. 당나라의 산학제도의 교과서로 쓰인 산경십서(算經十書) 중에 포함되어 있으나 『삼개』와 『육장』의 이름은 중국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 산학제도에 이 두 가지가 들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일찍이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수학자들이 편찬한 수학책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산학제도에 관하여서는, “산학은 산술을 교수한다.”라고 『고려사』에 짤막한 기록이 보일 뿐이지만, 명산업(明算業)의 시험과목으로 『구장』·『철술』·『삼개』·『사가(謝家)』를 실시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명산과(明算科)의 시험에 출제된 이 네 과목이 산학제도에 있어서의 교과내용의 거의 전부였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사가』의 이름은 중국의 산서 중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교과서는 중국계의 산서를 적당히 재편집한 것으로 믿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회계관리의 적임자가 부족하고, 그 때문에 산사(算士)의 양성과 채용이 시급하다는 호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종 12년(1430) 사역원(司譯院)의 주부(注簿) 두 사람을 명나라에 보내어 수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같은 해에 제정된 잡과십학(雜科十學)의 교육과정 중 산학에 관한 내용은, 『상명산법(詳明算法)』·『양휘산법(楊輝算法)』·『산학계몽(算學啓蒙)』·『지산(地算)』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상명산법』·『양휘산법』·『산학계몽』이 중요시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간행된 『경국대전』에 산학의 채용시험(取才)의 출제교과서로 이 세 책만이 남겨졌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산학제도 아래에서 주로 재정·회계를 담당하는 기술관료인 산사를 양성하였다.
특히, 영조대(1724∼1776)에는 산학제도가 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확대되었다. 산학의 학생인 산생(算生)의 정원을, 종래의 15명에서 61명으로 대폭 늘렸다는 『속대전(續大典)』에 있는 기록이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학 합격자명단인 『주학입격안(籌學入格案)』에 의하면 홍치(弘治), 즉 1488년(성종 19)∼1505년(연산군 11) 당시부터 1888년(고종 25)에 이르기까지 산사로 뽑힌 사람들의 수는 1,727명에 달한다.
앞에서 산사의 업무는 주로 정부 내의 재정·회계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주학입격안』을 보면, 천문·역산(曆算)의 분야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