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학당 ()

제도
조선시대, 한성의 동 · 서 · 남 · 중 4개 부에 설치된 관립교육기관.
이칭
이칭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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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부학당은 조선시대 한성의 동·서·남·중 4개 부에 설치된 관립교육기관이다. 보통 사학이라 칭한다. 제도적으로는 성균관의 부속학교로 볼 수 있지만, 연령이나 수학 과정에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다만 성균관은 생원·진사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 사부학당은 유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사부학당은 한성 지역의 유생을 행정 단위로 관리하고 교육하는 관립교육기관이라는 점, 제도의 존속 기간이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미가 크다.

정의
조선시대, 한성의 동 · 서 · 남 · 중 4개 부에 설치된 관립교육기관.
제정 목적

초기에는 유교식 학교제도의 이념, 즉 소학(小學)-대학(大學)의 위계에 따라 한성 지역 8세∼15세의 동몽(童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동몽교육을 담당하면서부터는 한성 지역의 각 부의 유생[일부 지방유생 포함]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전환하였다.

내용

사부학당의 전신은 고려 원종 2년(1261)에 설립된 동서학당(東西學堂)으로, 개경(開京)의 동부와 서부에 설치하여 각각 별감(別監)을 두고 가르쳤다. 이후 고려 말에는 5개 부에 학당을 세워 오부학당(五部學堂)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사부학당도 이러한 고려의 제도에 따라 한성의 동 · 서 · 남 · 북 · 중 5부에 학당을 세우는 오부학당으로 계획되었지만, 북부학당이 설립되지 않으면서 사부학당으로 정착되었다.

사부학당의 설치는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학당 건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사찰 건물을 빌려서 사용하였는데, 동부학당은 순천사(順天寺), 서부학당은 미륵사를 이용하였다. 이후 남부학당이 1411년(태종 11) 한성부(漢城府)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건립되었고, 중부학당이 1422년(세종 4) 12월 중부 관광방(觀光坊: 현재 종로구 중학동)에 신축되었다. 그 사이 사찰을 이용하고 있었던 동부학당과 서부학당도 1435년(세종 17)을 전후로 독립학사를 신축하였는데, 동부학당은 동부 창선방(彰善坊: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안)에 서부학당은 서부 여경방(餘慶坊: 현재 종로구 광화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북부학당은 끝내 설립되지 못하고 성종 대에 반포된 『경국대전』에 중학 · 동학 · 남학 · 서학으로 구성된 사학[종6품 아문]으로 법제화되었다.

사부학당은 성균관 부속학교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문묘(文廟)를 별도로 설치하지 않았고, 사학 유생은 문묘의례나 각종 시험에서 성균관 유생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 전기의 유생 정원은 학당마다 100명이었으며 입학 대상은 관할 부내의 유생이었다. 초기에는 유교식 학교제도의 이념, 즉 소학-대학의 위계에 따라 8세∼15세 정도의 동몽(童蒙)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동몽교관이 동몽교육을 담당하면서부터는 동몽 이후의 일반 유생을 대상으로 하였다. 성균관생원(生員) · 진사(進士)를 주 대상으로 한다면, 사학은 관할 지역의 유학(幼學)을 교육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교육과정 운영이나 각종 시험에서 성균관 유생과 사학 유생은 특별한 차이가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사학의 정원을 5명으로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학당의 거재생 정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주로 지방 유생이었고, 사학 유생은 한성 각 부의 전체 유생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들은 『청금록』을 통해 관리되는 청금유생이기도 하였는데, 효종대에는 그 규모가 1,000명 정도였고, 영조대에는 2,000~3,0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사부학당의 유생이 증가하면서 사학의 교육은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과시(課試)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일상적인 교육이 어렵게 되자, 정기적인 시험을 통해 사학 유생의 학업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사학 유생이 참여하는 과시에는 매월 대사성이 평가하여 우등자 10인에게 소과 직부의 은사를 주는 승보(陞補), 매 계절마다 각 학당의 교수가 1차로 선발한 다음 연말에 대사성과 학당 교수가 최종 선발하여 우등자 24인[제술 16인, 고강 8인]에게 마찬가지의 은사를 주는 사학합제(四學合製)가 있었다.

또한 사학 유생은 성균관이 주관하는 과시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비록 경학을 평가하는 전강(殿講)에는 사학에 거재하는 유생만 응시할 수 있었지만, 제술을 평가하는 절제(節製)가 통방외(通方外)로 시행할 경우에는 방외유생(方外儒生)의 자격으로 응시할 수 있었고, 은사에서도 성균관 유생과 차이가 없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사부학당의 운영 방식이 과시 중심으로 전환되자 교관 임용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 전기에는 학당마다 교수(敎授) 2인과 훈도(訓導) 2인을 배정하여 일상적인 교육을 시행하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소속 유생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교수와 훈도의 정원을 1인씩 감소시키고, 그 대신 학문 능력이 뛰어난 홍문관 · 승정원 등의 시종신(侍從臣)을 사학 겸교수(兼敎授)로 임명하여 각종 과시를 주관하게 한 것이다. 이점에서 조선 후기의 사부학당은 교육 대상, 거재 방식, 교육 과정 운영, 교관 임용 등 여러 측면에서 조선 전기와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변천사항

사부학당은 개항기까지 유지되다가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향교서원과 함께 폐지되었다.

의의 및 평가

사부학당은 한성 지역의 유생을 행정 단위로 관리하고 교육하는 관립교육기관이라는 점, 제도의 존속 기간이 조선 시대 내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미가 크다. 서양의 경우 특정 지역의 학생을 행정적으로 관리하고, 공적으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하는 것은 18~19세기인 데 비하여, 조선의 경우는 14세기 말 개국 당시부터 공적 교육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사부학당은 그 한 사례이다. 이 점에서 사부학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운영된 공적 교육제도에 대한 연구는 교육사 서술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과시등록(課試謄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이만규, 『조선교육사』(을유문화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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