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 참봉 이시명(李時明)의 아들로, 승의랑(承議郎) 이시성(李時成)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안동장씨로 장흥효(張興孝)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의 형이 된다.
13세 때 외할아버지 장흥효의 문하에 들어가서 『맹자』의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는 것)의 설을 힘써 배웠다. 또한, 『주역』의 선천후천설과 주돈이(周敦頤)의 태극설을 배워 흔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선현들의 인(仁)에 대한 언구들을 모아 『구인략(求仁略)』이라 이름하여 이를 아침저녁으로 독송하였다.
1661년(현종 2) 수석(水石)을 찾아 저곡(楮谷)에 옮겨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일찍부터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궁구하여 이해하지 못한 바가 없었으나,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는 성리학 공부를 중단하고 손자(孫子: 이름은 孫武)와 오자(吳子: 이름은 吳起)의 병서를 읽어 기정합변(奇正合變: 기습과 정공, 임기응변)의 묘리를 연구하고 산천의 험이(險易)와 주변국가의 정황을 조사하여 효종의 북벌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죽은 뒤에는 쓸모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근사록』·『심경』·『성리대전』·『역학계몽』·『주자절요』·『퇴계집』 등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예를 존중하여 『가례』를 참작, 상제대요(喪祭大要)와 절목(節目)을 궁진정리(窮盡整理)하여 습속(習俗)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존재집(存齋集)』·『구인략(求仁略)』·『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