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원(子圓), 호는 연생당(戀生堂). 홍유(洪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보현(洪普賢)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길민(洪吉旻)이며, 어머니는 경진(慶臻)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에 원자우동시학(元子右同侍學)이 된 뒤 예문관검열과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410년 지평이 되고, 1414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 해에 동부대언(同副代言)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했으나 판결을 잘못한 책임으로 한때 면직되었다. 1415년 복관되어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된 뒤, 1417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일시 사직했다가 곧 순승부윤(順承府尹)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예조·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다음 해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병조의 아전(衙前)을 불법으로 책문해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단으로 이배되었다.
1426년에 풀려나서 인순부윤(仁順府尹)·평안감사·한성부윤 등을 거쳐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진상한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 해서 파직되었다. 1433년 복관되어 전주부윤이 되었고, 1437년 판한성부사에 올랐다.
이듬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본국으로부터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귀국 때는 황제가 칙명을 내려 원유관복(遠遊冠服 : 먼 길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관리복장)을 보내주었다. 귀국 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시와 술을 좋아하며, 직언을 잘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