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하려는 것이 제사일 경우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힌 사람은 상으로 제사에 참례시키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로 제사에 참례시키지 않았다. 활쏘기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남자의 덕행을 수양하는 방법이며 심신을 단련하고 국가의 비상시를 대비하는 훈련 방법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사례에는 대사례와 향사례(鄕射禮)의 두 가지가 있다. 주관하는 곳에 따라 임금이 주관하면 대사례, 대부나 지방관이 주관하면 향사례라 하였다. 향사와 대사는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 성행한 의식으로, 사례를 행하기 전에 연례(燕禮)를 행하여 군신의 의리를 밝힌 뒤에 시행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1477년(성종 8)성종이 처음으로 행하였다 한다. 성균관에 나와서 선성(先聖)들에게 석전(釋奠)의 예를 드리고 명륜당(明倫堂)에서 제목을 내어 과거를 보인 뒤 사단(射壇)에 나가 대사례를 행하였다. 그 뒤 1534년(중종 29)·1743년(영조 19)·1764년에 시행한 기록이 있다.
대회에는 종친을 비롯해 3품 이상의 문무관원이 참가했으며, 과녁을 맞힌 자와 맞히지 못한 자를 동서로 갈라서 세우고, 맞힌 자에게는 상품으로 옷이나 채단 같은 것을 하사하고, 맞히지 못한 자들에게는 벌주(罰酒)를 주어서 후일을 경계하는 것이 통례였다. 쏘는 화살의 수와 참가 범위에 일정한 규정이 없었으나, 영조 때 오광운(吳光運)의 청에 따라 한 번에 쏠 수 있는 화살의 수를 4개로 정하였다. 참가 범위도 정2품 이상으로 확정시키고 종2품관은 정수가 부족할 때 충당시켰다.
활을 쏠 때 「대사악장(大射樂章)」 7절의 음악에 맞추어서 활을 쏘게 되며, 제4절에 첫 살을 쏘아서 매 음절에 한 발씩 쏘아 7절이 끝나면 4시(四矢)를 모두 쏘았다. 대사례가 시작하기 전 대사의 의식이 있었다. 왕이 단소(壇所)에 도착하면 참가한 사관(射官)과 활쏘기를 돕는 행사관(行射官)·시위대(侍衛隊)·종친·문무백관·성균관유생들은 지정된 장소에 나열해 대기하고 있다가, 왕이 어좌에 앉으면 음악에 맞추어 4배로 알현의 예를 드리는 것으로 의식이 시작되었다.
상호군 두 사람이 임금의 활과 살을 시중들고, 병조판서는 준비 여하를 점검해 시작을 알린다. 왕이 화살을 활에 먹이면 악공들이 일제히 음악을 연주해 3절과 4절 사이에 이르면 첫째 화살을 쏘았다. 맞혔으면 ‘획(獲)’이라 하고, 화살의 방향이 표적보다 낮으면 ‘유(留)’, 높으면 ‘양(揚)’, 왼쪽으로 갔으면 ‘좌(左)’, 오른쪽으로 갔으면 ‘우(右)’라고 소리쳐 그 결과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제2시는 음악의 5절에, 제3시는 음악의 제6절에, 제4시는 음악의 제7절에 맞추어서 발사하고, 제1시와 같이 보고하였다. 이때 화살이 과녁에 명중되면 기를 들고 있던 자가 기를 휘둘러서 명중했음을 참관자에게 알린다.
왕이 활쏘기를 마치면 음악도 그치고 상호군은 활을 돌려받는다. 왕이 자리로 돌아가면 시사관들이 5발씩을 음악에 맞추어 쏘고, 과녁에 맞혔으면 북을 쳐서 명중을 알린다. 쏘기를 마치면 모두 단 아래로 돌아와서 동서로 나누어 서며, 병조판서가 맞힌 자의 이름과 맞힌 화살의 수를 기록해 상줄 것을 청하고, 맞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줄 것을 청한다. 시상이 끝나고 사용하였던 기구를 거두고 일제히 왕에게 4배함으로써 모든 의식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