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윤 ()

해동역사
해동역사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한국의 역사서인 『해동역사』를 저술한 학자.
이칭
대연(大淵)
옥유당(玉蕤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65년(영조 41)
사망 연도
1814년(순조 14)
본관
청주(淸州)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한치윤은 조선후기 『해동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65년(영조 41)에 태어나 1814년(순조 14)에 사망했다. 1789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남인으로 출세하기 어려웠기에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1799년 서장관으로 파견된 한치응을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다. 말년에 한국사 서술에 몰두하여 70여 권에 이르는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김정희, 홍명주, 심영석 등과 교유하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여 색다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한국의 역사서인 『해동역사』를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蕤堂).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헌납(獻納) 한덕량(韓德良)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한원도(韓元道)이며,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9세 때에 이미 글을 읽으면 그 뜻을 완전히 깨달을 만큼 숙성하였다. 또한, 청년기에는 시문에 뛰어나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남인의 정치세력이 완전히 꺾여 있던 터라 벼슬에의 뜻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영조정조대의 탕평정국(蕩平政局)이라 하더라도 그가 속한 남인들은 정치무대에서 힘을 잃고 대부분 학문에만 전력하던 추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만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응시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지체로도 불리는 것은 아들 한진상(韓鎭象)이 동지돈녕부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87년(고종 24) 삼대추증(三代追贈)에 의해 그에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증직되었다.

1799년 10월 북경에 사행(使行)하는 집안 형님 한치응(韓致應)을 수행해, 당시 학자들이 가고 싶어했던 선진문물의 본거지 북경에 약 2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살펴보았다. 당시의 사행은 의례적인 외교적 차원의 통교(通交)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교류의 중요한 기회도 되었다. 따라서 북경여행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개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이러한 학문적인 기틀 위에서 한국사의 객관적인 서술을 기도하게 되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원편(原篇) 70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그의 만년의 10여 년 동안에 걸쳐서 이룩한 업적이다. 이 밖에도 북경을 여행할 당시의 연행일기(燕行日記)와 많은 유고(遺稿)가 조선 말기까지도 그 증손자인 한일동(韓日東)에 의해 간직되고 있었으나, 오늘날 그 소장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생 동안 젊어서는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중년에는 북경을 찾아서 견문을 넓혔으며, 만년에는 한국사의 객관적인 편찬물을 이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집안에서는 일찍이 죽은 형님 한치규(韓致奎)의 식솔을 극진히 돌보았다.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진사가 된 뒤 현감까지 된 것도 그의 보살핌 덕분이었다.

한편, 당색을 초월해 폭넓은 학우들을 사귀는 데 노력하였다. 당시는 학연(學緣) · 지연 · 당색 등을 초월해 학문교류가 활발했던 시대상황에서도 연유하지만 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가 죽은 뒤 상청에 보낸 만장(挽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그의 원만한 인격과 학문적인 업적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후대 김정희(金正喜)는 만장에서 그를 송대 『옥해(玉海)』의 저자 왕응린(王應麟)과 청나라 초기의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에 비유해서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한치응 · 홍명주(洪命周) · 심영석(沈英錫) 등도 그와 같이 평가했으며, 김유헌(金裕憲)도 그의 인품을 옥(玉)과 난(蘭)에 견주었다. 그리고 이해응(李海應)은 그를 후한 때 은거하면서 학덕을 쌓고 청빈하면서도 봉양(奉養) · 우애를 일삼았던 모용(茅容)과, 역시 같은 무렵 신선과도 견줄 만큼의 풍채와 학문과 덕행을 가졌던 곽태(郭泰)와 비유하기도 하였다.

만장에서 그를 높이 평가한 이들은 대부분 당대 당상관으로 있던 지체 높은 친구 내지는 그를 아끼던 인물이었지만, 이 밖에도 그를 기리던 사람들은 허다하였다. 『해동역사』의 서문에서 유득공(柳得恭)이 그를 평가한 것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이와 같이, 그는 한국사학사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해동역사』의 저자라고 하는 위치에서만이 아니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우리 나라의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도외시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전통적인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학문적인 분야를 개척하고 이를 위한 색다른 업적을 쌓아올린 성과는 당시의 학문적 · 사상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참고문헌

『해동역사(海東繹史)』
『玉蕤堂韓公行狀』
『한치윤(韓致奫)의 사학사상-해동역사(海東繹史)를 중심으로-」(황원구, 『인문과학』 7, 1962)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황원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