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총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백성에게 부여한 각종 군사 수의 총액이다. 군사 기구들을 신설하면서 17세기 후반까지 군총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군역 부담도 늘어났다. 국가는 양정(良丁)을 추가적으로 확보하는 한편, 군총 자체를 하향 정액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영조 대 중반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간행하여 군총을 정액화하였고, 이는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대체적으로 준수되었다.
조선시대에 여러 군영에 소속된 정군(正軍)과 보인(保人) 등 각종 군사 수의 총액을 군총이라고 하였다. 군역은 군총을 바탕으로 군현 단위로 부과되었다. 파악된 군총은 군현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액수로 배정되었고, 군현의 수령은 파악한 양정(良丁)을 기준으로 배정된 액수의 군역을 개별 백성에게 부과하고 수취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군총은 군역이 부과되고 수취되는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군총의 크기는 군역의 부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17~18세기에는 파악된 양정에 비해 군총이 과다해지자 한 사람이 여러 종의 군역을 지는 등 문제가 발생하며 양역 수취는 주요한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국가는 양정의 수에 비해 군총이 과다해지는 ‘군다민소(軍多民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논의와 제도적 방편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비롯한 여러 군영이 새롭게 창설되면서 군총은 크게 늘어났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약 40만 명에 불과하였던 군총이 17세기 중반 현종 대까지 2배 이상인 100여만 명에 가깝게 증가한 것이다.
반면 17세기 전란과 기근 및 전염병 등으로 호적에 기재된 양정의 숫자는 큰 변동을 겪었다. 이를테면 1670년(현종 11)부터 1672년(현종 13)까지 진행된 경신 대기근과 1695년(숙종 21)부터 1700년(숙종 30)까지 진행된 을병 대기근을 겪은 이후에는 호적에 기재된 전국의 인구가 각기 50여만 명과 140여만 명씩 감소하였다. 이 외에도 국가에서 파악하는 인구와 양정(良丁)의 수는 재해를 겪을 때마다 감소하였다. 이처럼 양정을 확보하는 일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늘어난 군총으로 인한 군역의 부담은 점차 심화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여 17세기 전반에 국가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고 면리제(面里制)를 정비하는 등의 방식으로 양정을 추가적으로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궁극적으로는 양역을 사정(查正)하고 군액을 감축하는 등 군총 자체를 줄이기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 전반 여러 군영의 창설로 과도해진 군총은 오랜 기간 조선 사회의 불안 요소로 작용하였다. 국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로 1748년(영조 24)에 『 양역실총』을 간행하여 군총의 수를 이전보다 줄어든 57만여 명으로 정하였다. 이때 고정된 군총은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군총이 하향 정액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