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어영 ()

근대사
제도
조선 말기, 궁궐 및 도성을 방어하던 군영의 하나.
이칭
이칭
친군 총어영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1888년(고종 25) 4월
폐지 시기
1894년(고종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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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총어영은 조선 말기에 궁궐 및 도성을 방어하던 군영의 하나이다. 1888년(고종 25) 4월에 친군 5영 체제를 3영 체제로 개편할 때 기존의 친군 별영(別營) 체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름을 바꾸어 창설한 군영이다. 1894년 갑오개혁 시기까지 통위영, 장위영과 함께 궁궐 및 도성 내외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정의
조선 말기, 궁궐 및 도성을 방어하던 군영의 하나.
제정 목적

각 병영이 나누어져 설치되어 있어 비용이 많이 들고 병사들의 훈련과 통제가 불합리하므로 이를 개편하라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1888년(고종 25) 4월에 설치되었다. 기존의 친군5영(親軍五營) 체제를 3영 체제로 개편할 때 금위영어영청의 병사들을 모아 1884년(고종 21) 11월에 설립한 친군 별영(別營)을 재편하여 창설된 군영이다. 이때 우영, 후영, 해방영을 합해서 통위영으로, 전영과 좌영을 합하여 장위영으로, 별영을 총어영으로 개편하였다.

총어영의 조직과 구성은 이전의 친군 별영 체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였다. 총어사에는 별영사로 있던 이종건을 임명하였다. 3영 체제 아래 도성 방위는 이전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분장하였던 체제와 비슷하였다.

내용

총어영의 편제는 영사를 중심으로 전초, 좌초, 중초, 우초, 후초의 5개 초에 각기 8개 대를, 별도로 대령군, 수문군, 등롱군, 장막군 등이 편제되어 있었다. 총어영의 전신인 친군 별영의 병력은 총 2,288명이었다. 총어영의 도성 방위는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를 담당하였고, 도성 밖 순찰 지역은 혜화문 밖 안암동에서 동쪽으로 마장리, 남쪽으로는 독서당 고개, 북쪽으로는 왕십리까지였다. 영색(營色)은 백색으로 표시하였다.

변천사항

1892년(고종 29) 9월에 용호영, 경리청까지 친군 칭호를 붙임으로써 임오군란 이전과 같은 5영 체제로 복구되었고, 이후 총어영은 친군 총어영으로 불렸다. 1894년(고종 31) 음력 8월에 경무청이 설치된 뒤 순찰을 내보내는 것을 중지하였다. 자료 기록상으로 그해 11월 인사 기록이 보이는데 갑오개혁 무렵 해체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원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단행본

육군군사연구소 편, 『한국군사사 9』-근현대 I(경인문화사, 2012)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국학자료원, 2002)
최병옥, 『개화기의 군사정책연구』(경인문화사, 2000)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조재곤(서강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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