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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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
  • 개항기
조선 말기의 군영(軍營).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원수 (서울교육대학, 서양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말기의 군영(軍營).

내용

청나라의 군제를 모방해 친군 좌·우·전·후·별영을 설치함으로써 5영의 체제를 갖추었다. 1882년(고종 19) 11월 훈련원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훈련받는 부대를 신건친군좌영(新建親軍左營)이라 하고, 동별영(東別營)에서 주선민(朱先民)에게 훈련받는 부대를 친군우영이라 하였다.

그 뒤 1883년 10월 교련소를 설치하여 친군전영(親軍前營)이라 칭하고, 1884년 7월 연무대(鍊武臺)에 이주한 부대는 친군후영(親軍後營)으로 삼았으며, 그 해 11월 금위영(禁衛營)을 설치하였다. 이어 지방에도 1885년 평양 감영에 친군서영(親軍西營)을, 1886년에는 해방영(海防營) 설치하였다.

1887년 강화에 심영(沁營), 대구에 남영(南營), 1893년 전주에 무남영(武南營), 1894년 종성(鍾城)에 북영(北營), 청주에 진남영(鎭南營), 춘천에 진어영(鎭禦營) 등을 두었다.

친군제영(親軍諸營)의 기본적인 조직은 영사(營使) 1인, 병방(兵房) 10인, 영관(領官) 1인, 참군(參軍) 1인, 초관(哨官) 5인, 별군관(別軍官) 5인, 군의(軍醫) 1인, 초장(哨長) 5,6인, 집사(執事) 25인, 별무사(別武士) 8,9인, 사무직으로 서리 10여 인, 정령대령서리(政令待令書吏) 1인, 기별서리(奇別書吏) 2,3인, 초서(哨書) 5,6인, 고직(庫直) 5,6인, 청직(廳直) 2,3인, 의례병(儀禮兵)으로 뇌자 87인을 두었다.

또한 순령수(巡令手) 87인, 등롱군(燈籠軍) 44인, 장막군(帳幕軍) 44인, 대령군(待令軍) 200여 인, 병정(兵丁) 5초(五哨), 화병(火兵) 40∼50인, 별파진(別破陣) 10여 인, 복마군(卜馬軍) 30여 인, 수문군(守門軍) 60여 인, 마부(馬夫) 5인, 잡색원(雜色員) 50여 인이 있었다. 그러나 중앙군의 친군영은 1888년 총어(摠禦)·통위(統衛)·장위(壯衛)·경리(經理)의 4영으로 해체,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 『고종실록』

  • - 『고종시대사』

  • -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육군본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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