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삼청(內三廳) · 금군청(禁軍廳)이라고도 한다. 조선 전기 국왕의 친위군인 금군(禁軍)은 내금위(內禁衛) · 겸사복(兼司僕) · 우림위(羽林衛)의 3위로 설치되어 각각 왕을 호위하고 3명의 장(將)이 통솔하였다.
효종 때 이들 금군은 왕권이 강화되자 그 군직을 내삼청으로 통합해 일원화하고 군영으로 발족하였다. 즉, 당시에는 내삼청장을 얻기 어렵다는 이유로 좌우별장(左右別將)을 두고 금군을 관령하도록 했으며 대개 기병으로 편제되었다.
1666년(현종 7)에 내삼청을 금군청으로 개칭하였다. 동시에 그 수도 700명으로 정하고, 이들을 7번으로 나누어 7명의 번장(番將)을 두고 교대로 영솔하게 하였다. 좌우별장도 단별장제(單別將制)로 바뀌면서 금위영(禁衛營)의 중군(中軍)이 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686년(숙종 12)에는 병조에서 별도로 금군별장을 차출하게 함으로써 금위영과 분리된 독립군영이 되었다. 이들 금군은 700명을 7번으로 나누어 기병체제인 3정(三正, 九領, 100명)으로 하고, 배호(陪扈)와 입직시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즉, 별장(別將, 종2품) 1명 밑에 7명의 장(將, 정3품, 겸사복장 2, 내금위장 3, 우림위장 2)을 두어 교대로 금군을 영솔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 밑에서 정(正, 종3품) 21명, 영(領, 종9품) 63명이 각각 금군을 관장하였다. 금군 700명은 내금위 300, 겸사복 · 우림위 각각 200명으로 편제하되 이들은 모두 체아(遞兒)되었다.
1755년(영조 31) 금군청은 용호영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그 별장만은 그대로 ‘금군별장’이라 하였다. 1791년(정조 15)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숙위소(宿衛所) · 장용영(壯勇營) 등을 설치하고 직접 왕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금군 700명 중 100명을 줄여 600명이 던 것을 순조 때에 다시 700명으로 늘렸다.
이처럼 금군은 가장 우수한 무관들로 구성되어 근무일수 · 시취(試取) 등을 통해 품계가 올랐다. 우수한 자는 용호영 내의 당상군관(堂上軍官, 정원 16명) · 교련관(敎鍊官, 정원 14명) 그리고 외방의 무관직이나 각 군영의 무관직 등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들 금군은 대개 국왕을 측근에서 모실 뿐 아니라 인정전(仁政殿) 월랑(月廊)의 입직, 도성(都城) 8문 등을 비롯한 요소요소에 분배입직(分配入直)하였다. 또한 여러 곳의 적간(摘奸 : 난잡한 행동이나 부정한 일을 조사하고 적발함)도 행하였다. 그 뒤 1882년(고종 19)에 혁파되었다가 다시 복설되었다. 그러다 1894년 용호영을 파하고 통위사(統衛使)가 관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