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한 궁중 숙위를 담당했던 내상직(內上直)을 정리, 개편하여 조직한 왕의 친위군 혹은 금군이다. 처음에는 태종의 신임을 받는 수하병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그 수가 불과 60∼90인에 지나지 않는 정예 부대로서, 내금위절제사(內禁衛節制使)에 의해 영솔되었다.
그 뒤 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1424년(세종 6) 내금위와 같은 임무를 띠고 있던 내시위(內侍衛)를 통합해 그 수가 200인에 이르렀다. 이들은 교대로 근무하는 병종이 아닌 장번군(長番軍)으로서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주로 양반 자제로 편제되었으며, 다른 병종보다는 후대하였다.
『경국대전』이 성립된 당시에는 3인의 내금위장이 통솔했고, 190인 정원이 모두 체아직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왕을 직접 호위하는 것이었으나, 무재(武才)가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양계(兩界)에 부방(赴防)했으며, 조선 전기 무장 중에는 내금위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빈번한 부방 등으로 왕의 호위의 약화를 가져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연산군 · 중종 때에는 예차내금위(預差內禁衛)의 제도를 실시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내금위를 충철위(衝鐵衛)로 개칭했고, 예차내금위는 소적위(掃敵衛)로 개칭되어 그 수가 700인에 이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중종 때 다시 내금위로 환원하고 1510년(중종 5) 실차(實差) 190, 예차(預差) 200, 가예차(假預差) 100으로 정해지는 등 금군의 중추를 이루었다.
후기에 와서 내금위는 겸사복(兼司僕) · 우림위(羽林衛)와 함께 금군청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1775년(영조 51)에는 용호영에 속했는데 당시 수는 300인으로 금군 700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여 핵심을 이루었다. 그 뒤 1892년(고종 29)에는 무위영(武衛營)에 속했다가 1894년에는 통위영(統衛營)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