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강씨(姜氏)이고 본관은 금천(衿川)이다. 시호는 민회빈(愍懷嬪)이나 일반적으로 강빈(姜嬪)으로 많이 불린다.
아버지는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이다. 민회빈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석철(李石鐵)·이석린(李石麟)·이석견(李石堅)이고, 딸은 경숙군주(慶淑郡主)·경녕군주(慶寧郡主)·경순군주(慶順郡主)이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인조 5) 12월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청나라가 사대관계를 강요하면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이듬해 세자 부부는 조선과 청나라 간의 화약조건으로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볼모생활을 시작하였다. 세자 부부가 심양에 머무는 동안 조선은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면서 청나라의 과도한 군사적·경제적 요구에 시달렸다. 만 8년간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1645년(인조 23) 2월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소현세자는 두 달 만에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강빈은 이듬해 역모로 몰려 사사되었다.
강빈은 왕실여성으로는 드물게 8년 동안 심양에서 볼모살이를 하고, 귀국할 때 많은 재물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경영 수완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세자 부부가 머물던 심양관의 식솔은 200여 명에 이르렀는데, 강빈은 이곳의 안주인으로 세자가 관소를 비울 때 대리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에 강빈이 인조의 의심을 사 대역 죄인으로 몰리게 되었을 때 ‘관여하지 말아야할 바깥일에 관여하고, 조정에 올리는 장계(狀啓)를 함부로 보고 고치고 하였다’는 것도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심양관에는 많은 인원이 상주하여 상당한 운영 경비가 필요하였다. 처음에는 청나라 황실에서 비용을 담당하였으나 나중에는 둔토(屯土)를 지급하여 갈아먹게 하였다. 이에 심양관에서는 속량인(贖良人)을 동원하여 이를 경영하고, 역관을 두고 청인들과 교역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 황실이나 귀족 여인들과도 일정한 교류를 하였다. 강빈은 청의 심양관에서 볼모살이를 했지만, 당시 왕실여인들과 달리 적극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강빈과 소현세자는 1644년(인조 22) 11월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세자 부부를 맞이한 인조의 태도는 싸늘하였으며, 백관이 하례를 드리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는 청나라가 친청(親淸)의 입장을 가진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폐위시킬까 의심하였다. 인조는 아들내외를 냉대하여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학질을 앓다가 치료 중에 급서하였다. 인조는 세자의 상례를 예법에 맞지 않게 단상(短喪)으로 치렀다. 그리고는 나라가 위급한 상황이라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며 10살이 된 원손(元孫)을 제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세웠다.
이러한 배경에는 소의 조씨(昭儀 趙氏)의 모함이 작용하였다. 1645년궁중에서 조씨에 대한 저주 사건이 일어났는데, 강빈이 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다. 1646년(인조 24)에는 인조가 자신의 음식에 독약이 들었다는 핑계로 강빈의 궁녀 3인과 주방 궁녀 2인을 내사옥에 내려 국문하고 강빈도 후원 별당에 감금하였다. 가혹한 국문에도 궁녀들은 모두 죄를 인정하지 않고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이 약물에 중독된 증상이 있다며 해독제를 복용하고, 다시 강빈을 압박하였다. 드디어 2월 3일 비망기를 내려 강빈이 독약을 넣은 주동자이고, 심양에서 몰래 역위(逆位)를 꾀하는 음모를 획책했다며 처벌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측근에 있었던 궁녀들이 불복하면서 무참한 죽음을 당했고, 조신들도 일제히 불가함을 역설했으나 강빈은 끝내 사사되었다.
이어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형제들도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었다. 강빈의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그 중 이석철·이석린 형제는 의혹 속에 죽고 말았다. 셋째 아들 이석견은 효종대에 경안군(慶安君)이 되었다. 효종 때 황해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소장을 올려 강빈의 신원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사실이 옳게 밝혀지면 종통(宗統)이 남은 아들 이석견에게 돌아가므로, 효종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김홍욱을 죄인으로 몰아 장살(杖殺)하였다.
강빈은 1718년(숙종 44)에 이르러서야 복위되고 민회빈(愍懷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는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영회원(永懷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