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태후는 1099년(숙종 4) 왕후로 책봉되었으며, 예종과 상당후(上黨侯) 왕필(王佖),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 등을 낳았고, 아들인 예종이 왕위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태후로 추증되었다. 1112년(숙종 7) 7월 기사일에 불은사(佛恩寺)에 있다가 병이 위독하여 대궐로 돌아오다가 신박사(信朴寺)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숙종이 1112년 8월 병신일에 왕실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며, 능호는 숭릉(崇陵)이라 하였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은 숙종과 더불어 천수사(天壽寺)이다. 명의태후의 신주는 27일간 혼전에 모셔졌다가, 1114년(예종 9) 10월 병신일에 숙종의 태묘에 합사되었다.
숭릉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남편인 숙종의 무덤인 영릉(英陵)이 있었던 개성특별시 판문군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왕후릉의 능제나 규모 및 구조 등도 파악할 수 없다. 고려시대에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를 설치하여 담당하였다. 특히 인종 대에는 왕릉이나 왕후릉을 수호하기 위해 산직장상(散職將相)이라는 위숙군(圍宿軍)을 두어 능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 고려사』 「위숙군조」를 보면 위숙군의 숫자는 능마다 달랐다. 숭릉에는 산직당상 2명을 두어 능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추존 세조의 창릉 이외에 왕후릉에는 모두 2명을 배치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남편인 숙종의 영릉에는 4명의 산직당상을 두었는데, 그것은 숙종이 위숙군 제도를 만든 인종의 직계 증조할아버지였기에 다른 왕릉보다 더 많은 관리인을 두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왕뿐만 아니라 왕후의 사후에도 별도로 능묘를 조성해 주고 능호를 붙였으며,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태후로 올려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명의태후의 숭릉은 이러한 고려왕릉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나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