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맏아들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의 쌍릉.
건립경위
효순왕후(孝純王后, 1715~1751)는 세자빈의 신분으로 1751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1728년에 효장세자의 왼쪽 곁을 비워 두었기 때문에 별도의 논의 없이 쌍분으로 안장되어 1752년에 완공하였다.
영조는 효장세자에게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를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즉위하는 1776년 3월 19일에 영조의 뜻에 따라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을 각각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숭하였다. 이때 묘를 영릉(永陵)으로 격상하였다.
형태와 특징
사후에 추존된 원종(元宗, 1580-1619)의 장릉(章陵)과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온릉(溫陵),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혜릉(惠陵) 등에서는 능으로 격상되면서 능제에 맞추어 석상을 추가하였으나, 영릉은 묘로 건립될 당시 그대로 유지되어 봉분에는 난간석(欄干石)이 없어 민묘처럼 보이며, 무석인 없이 문석인만 배치된 상태이다.
정자각(丁字閣)의 동쪽에는 두 채의 비각(碑刻)이 있다. 한 곳에는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의 묘소를 밝히는 표석이 있으며, 그 남쪽의 두 번째 비각에는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중하면서 세운 표석과 대한제국기에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로 추존하면서 세운 표석이 나란히 있다. 3기의 표석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재평가되어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진 상황이 담겨 있다.
의의 및 평가
영조 대에 왕과 왕후의 능과 세자와 세자빈의 묘의 격식을 명확히 구분하는 과정에서 영릉이 건립되었으며, 『국조상례보편』 편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릉은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의 공릉(恭陵)과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의 순릉(順陵)과 같은 능역을 형성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파주 삼릉’이라 불린다.
참고문헌
원전
- 『〔효순현빈(孝純賢嬪)〕묘소도감의궤(墓所都監儀軌)』(1751)
- 『〔효장세자(孝章世子)〕묘소도감의궤(墓所都監儀軌)』(1728)
단행본
-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Ⅶ』(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국조상례보편』(민속원, 2008)
인터넷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 위키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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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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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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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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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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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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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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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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