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태종 즉위년)에 고려 말 이래의 성중관(成衆官)을 폐지하는 대신 설치한 국왕의 친병이었다가 뒤에 위병(衛兵)으로 바뀌었다.
정원은 1419년(세종 1)의 200인에서 1458년(세조 4)에는 5,000인으로 늘어났으나 ≪경국대전≫에는 1,500인으로 감소, 조정되었다.
처음 별시위는 국왕의 측근 시위병이기 때문에, 양반 자제 등의 지원자가 엄격한 취재시험(取才試驗)을 거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특히 별시위는 말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노비를 소유하고 재산이 넉넉한 양반 자제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러나 가끔 재산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폐가 있었다. 이에 1446년(세종 28)에는 중앙은 훈련제조(訓鍊提調), 지방은 각도 관찰사가 지원자의 가계를 조사해 노비 10인 이상을 소유한 양반 자제만을 뽑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그 뒤 별시위의 정원이 늘어나게 되면서 부유한 양반 자제의 자원자만으로는 정원을 충당할 수 없었다. 이에 노비를 소유하지 못한 양반 자제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가난한 별시위에게는 봉족을 지급하는 문제가 논의되고, 1458년부터는 별시위에게 봉족 3인씩 배당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처가 오히려 폐단을 발생시켰다. 즉 별시위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시위 근무를 기피하고 봉족만을 차지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해당자들을 시위패(侍衛牌)에 편입시키는 등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다가, 성종대에는 이들에게 일체 봉족을 지급하지 않게 되었다.
별시위의 근무는 친병 1,500인이 5번으로 나뉘어 300인이 6개월씩 교대 근무하되 실제 복무하는 전원에게 종4품∼종9품의 체아록(遞兒祿)을 지급하였다. 가계(加階)는 48일간 근무하면 되고 종3품에서 거관(去官)되는데, 거관 때에는 관직이 없고 관계만 있는 산계(散階)가 된다.
거관 뒤에도 계속 근무를 자원하는 경우는 216일마다 가계가 되어 정3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재질이 우수한 자는 산계에 그치지 않고 수령이나 만호 등의 실직으로 나가는 길도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