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자격(子格), 호는 인재(寅齋) · 양졸당(養拙堂). 할아버지는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신집(申諿)이고,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신안(申晏)이다. 어머니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임세정(任世正)의 딸이다.
1390년(공양왕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393년(태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로 발탁되었는데, 당시 태조가 실록을 보자고 할 때 그 불가함을 강력히 논하였다.
이어 감찰 · 문하습유(門下拾遺) · 좌정언(左正言) · 형조좌랑 · 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로 나갔다가 다시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 이조정랑 · 사인(舍人) · 예문관제학 · 판승문원사(判承文院使) 등을 역임하였다. 1413년(태종 13)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발탁되는 동시에 춘추관편수관 ·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주장한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의 폐지는 다음 해에 실현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 · 병조참의 · 충청도관찰사 ·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417년에 공조참판에 올랐고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즉위 후 전라도 · 경상도 · 황해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하고 형조참판 · 진주목사 · 우군총제 · 좌군총제 · 예문관대제학 · 전라도관찰사 ·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433년(세종 15)에는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입, 큰 피해를 입히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야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라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면서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에 찬성으로 승진하여 세자이사(世子貳師) · 집현전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439년에 우의정에 올랐으며, 1442년에는 감춘추관사로 권제(權踶) 등과 더불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올렸다. 1444년에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공법(貢法) · 축성(築城) 등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불편한 것은 이를 건의, 시정하도록 하였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 『인재문집(寅齋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