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도(權蹈), 자는 중의(仲義)·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이고, 아버지는 찬성 권근(權近)이며, 어머니는 우정언 이존오(李存吾)의 딸이다. 부인은 판사(判事) 이휴(李携)의 딸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경승부주부(敬承府注簿)에 기용되었으나 감찰 때 대사헌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었다. 1414년(태종 14) 친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헌납(右獻納)이 된 뒤 병조정랑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거쳐, 1416년 사예(司藝), 1418년에 사인(舍人)을 지냈다.
1419년(세종 1)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사은사 경녕군(敬寧君)이비(李礻+非: 태종의 제1서자)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과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지냈다.
1423년 집현전부제학이 된 뒤 예조판서·대사헌·함길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30년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 경기도관찰사, 이듬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1435년 이조판서, 143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계품사(計稟使) 혜령군(惠寧君)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그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39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1442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인 신개(申槩)와 함께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다.
1443년 좌참찬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가 되었고, 1444년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이듬해에는 우찬성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오랫동안 문형(文衡: 대제학의 다른 이름)을 역임했으며, 작품으로 「세년가(世年歌)」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