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연대기인 『길속기(吉續記)』의 기록에는 1271년 9월 2일 ‘고려첩장(高麗牒狀)’이 도착했다고 하여, 삼별초 정부와 원종(元宗)의 정부를 구분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1268년과 1271년에 외교문서를 보낸 것이 몽골[蒙古]과의 관계 등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정부, 즉 몽골과 강화(講和)한 원종의 정부와 그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진도 정부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격이 다른 두 주체를 파악하지 못함에 따라, 두 외교문서가 몽골에 대한 태도 등에서 상반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점들을 조목별로 정리한 것이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이다.
1271년 삼별초 진도 정부가 보낸 원문서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 내용 중 1268년 고려 원종이 보낸 국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들만 간추린 기록이 「고려첩장불심조조」로 남아 있다. 현재 일본 동경대학 사료편찬소(史料編纂所)에 소장되어 있다.
삼별초 진도 정부가 일본에 보낸 원문서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 주체의 의문 대상이 된 부분만을 단편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전후 문맥을 알 수 없어, 내용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어떤 점을 의문시한 것인지도 불분명한 것이 많다.
이전의 고려 국서(1268)에서는 몽골의 덕을 칭송하며 사대(事大)의 군신례(君臣禮)를 맺었다고 하였는데, 이번의 국서(1271)에서는 몽골을 야만적인 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등의 상위 점, 폭풍에 표류한 자의 호송, 호병(胡兵) 수 만을 청군(請軍)한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첩장의 내용 전체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중 일본 측에서 의문시한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지만, 자료가 극히 적은 삼별초 진도 정부의 대몽항전(對蒙抗戰)이나 대일교섭(對日交涉) 태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