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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한국 사회의 고유한 토지 측량의 단위로, 일정한 양의 세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토지의 면적을 산출하는 방식.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결부법(結負法)은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사용한 고유의 토지 측량 단위이다. 결부법이라는 명칭은 결(結)과 부(負)라는 단위의 명칭으로부터 유래한다. 결부법은 일정한 양의 세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토지 면적을 파악하되, 결·부·속·파의 단위를 사용하여 1결=100부, 1부=10속, 1속=10파(1결=10,000파)의 관계로 편성한 것이다. 시기에 따라 운영상의 차이가 있으나, 적어도 통일신라 이후부터 조선까지 국가는 공식적인 토지 파악에서 결부법을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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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근대, 한국 사회의 고유한 토지 측량의 단위로, 일정한 양의 세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토지의 면적을 산출하는 방식.
내용

결부법(結負法)은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사용한 고유의 토지 측량 단위이다. 결부법이라는 명칭은 결(結)부(負)라는 단위의 명칭으로부터 유래한다. 결부법에서 사용하는 파(把)[줌], 속(束)[묶음], 부(負)[짐], 결(結)[먹]이라는 단위의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수확량을 기초로 토지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조선 후기에 작성한 『만기요람』의 설명에 따르면, 곡식 다발을 손으로 움켜쥔 1주먹[악(握)]만큼 세(稅)로 낼 수 있는 토지를 1파(把)라고 하고, 10파를 1속(束)으로, 10속을 1부(負)[혹은 복(卜)]로, 100부를 1결(結)로 정하였다고 하였다. 결부법은 결국 일정한 양의 세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토지 면적을 파악하되, 결 · 부 · 속 · 파의 단위를 사용하여 1결=100부, 1부=10속, 1속=10파(1결=10,000파)의 관계로 편성한 것이다.

결부법은 전근대 중국에서 사용한 경묘법(頃畝法)과는 원리가 다르다. 경묘법〔경무법〕이라는 명칭은 경(頃)묘(畝)를 단위로 사용하는(1경=100묘) 데에서 유래한다. 경무법에서도 100무, 즉 1경의 수확량이 약 100석이라고 이해하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1변이 1보(步)인 정사각형 240개[240제곱보]를 1묘로 정한다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경무법은 면적을 기초로 하는 토지 측량 방법이었다.

시기에 따라 내용과 운영 방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적어도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공식적인 토지 파악에서 결부법을 사용하였다. 일정한 세금을 낼 수 있는 능력, 혹은 그에 준하는 생산량을 기준으로 토지를 파악하는 결부법은 국가와 농민 모두에게 편리한 제도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결부가 수확량 혹은 부세량을 정하는 근거가 되는 토지의 실제 면적과 비옥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여 산출되는가와 무관하게, 일단 결부로 파악된 수치를 알고 있으면 국가 입장에서든 농민 입장에서든 다른 계산을 거치지 않고 얼마의 세금을 납부하고 거두는가를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변천과정

한국사에서 결부법이 언제부터 제도화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한 신라 촌락 문서, 그리고 봉암사(鳳巖寺)의 지증 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등의 금석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는 결부법을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통일신라시대 이전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경무법을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이후에도 결부와 함께 경무를 섞어 사용하는 사례가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통일신라와 고려 중기까지의 기록에 나타나는 결부는 중국의 경무법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면적을 기초로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여러 기록에서 결(結)과 경(頃)이 동일한 것으로 혼용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은 실제로 결부법이 비록 매우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으나, 예전의 제도는 ‘경무’를 ‘결부’라고 한 것으로 조선의 제도와 다르다고 하였다.

고려 전기 전시과 체제에서 사용한 결부법은 토지의 등급에 관계없이 그 결부의 면적이 동일하고, 등급에 따라 세금의 액수를 다르게 정하는 방식이었다. 전품의 등급은 매년 경작하는 토지를 상등, 한 해 경작하고 다음 해는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중등, 한 해 경작하고 다음 두 해는 경작하는 않는 토지를 하등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논과 밭 모두 상 · 중 · 하 3등의 전품에 따라 생산량의 1/4을 기준으로 수조액을 서로 다르게 규정하고 있었다.

결부의 면적을 동일하게 책정하고 전품의 등급에 따라 수조액을 달리하는 이러한 제도를 같은 면적에서 등급에 따라 서로 다른 세금을 걷는다는 의미로 ‘동적이세제(同積異稅制)’라고 한다.

전시과 체제가 무너져 가는 고려 후기에 와서 결부법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우선 토지의 등급을 상경과 휴경이 아니라 비옥도를 기준으로 상 · 중 · 하 3등급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토지의 결부 수를 책정하는 양전 과정에서 상 · 중 · 하 3등급으로 구분한 토지에 각각 20 : 25 : 30의 차등을 둔 서로 다른 양전척(量田尺)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1결의 실제 면적이 서로 다른 토지에 대해 수조액을 모두 동일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가리켜 ‘이적동세제(移積同稅制)’ 혹은 ‘동과수조제(同科收租制)’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려 후기 이래 관행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과전법의 성립을 계기로 정비된 이 결부법은 조선 초기부터 매우 조잡하고 불합리하다고 평가되었다. 우선 결부 수를 산출하는 양전척의 기준으로 명확한 근거가 없는 농부의 손가락을 기준으로 한 수지척을 사용하였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또한 상 · 중 · 하 3등으로 등급을 나눈 것이 당시 토지 비옥도와 생산력의 차이를 충분하고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국가 재정 운영과 부세 제도 운영의 기초가 되는 토지 파악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결부법의 결함과 폐단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1430년(세종 12)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1444년(세종 26)에 확정된 공법(貢法)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대체하는 새로운 전세 수취의 제도로서 6등급으로 구분한 정교한 형태의 새로운 결부법을 완성하였다.

공법에서 새로 규정한 결부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양전의 근거 척도를 주척(周尺)으로 고친다. ② 전국 각 도의 전품을 조사해서 1등에서 6등전으로 분등한다. ③ 각 등급 토지마다 1결당 400두로 곡물 생산량이 동일하도록 토지 한 변의 길이와 실제 면적을 비례적으로 정확하게 조절하여 결부 수를 산출한다. ④ 1등전의 실제 면적은 경무법으로 환산해 38무(畝), 2등전의 경우는 44무7분, 3등전은 54무2분, 4등전은 69무, 5등전은 95무, 6등전의 경우 152무로 정하고, 모든 토지 1결에서 연분(年分)에 따라 4~20두의 동일한 세액을 거둔다.

1결의 면적비는 1등전을 100으로 했을 때 2등전 117, 3등전 142, 4등전 181, 5등전 250, 6등전 400이다. 이 비례식을 결부 수에 적용하면, 10,000제곱척 전답을 기준으로 1등전이면 1결, 2등전이면 85부, 3등전이면 70부, 4등전이면 55부, 5등전이면 40부, 6등전이면 25부가 된다. 이와 같이 6등급으로 구분한 토지마다 1결의 면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양전 과정에서 등급마다 서로 다른 길이를 가진 6개의 척도를 표준으로 정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가리켜 '수등이척제(隨等異尺制)'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 양전을 할 때에는 6개의 서로 다른 척도를 사용하지 않고, 모든 토지를 동일한 1등전의 척도로 측량한 다음 미리 마련해 둔 환산표에 따라 각 등 전지의 결부 수를 산출해 내는 방식을 활용하였다.

1444년에 개정된 이 결부법은 조선 말기까지 국가가 토지를 파악하는 기본 방식으로 활용되었으며, 대한 제국기의 광무 양전 사업에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결부법은 고정된 면적을 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확의 표준 · 수세의 표준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결부 수를 산출하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여 부정이 발생하거나 토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결부법에 근거하면서도 토지 면적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방전법(方田法)을 채용한 양전이 제안되기도 하였으며, 유형원이나 정약용 같은 학자들은 결부법을 폐기하고 경무법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결부법의 성격이 변화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결부 산정의 근거가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신라 촌락 문서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결부법은 동일한 부세액을 납부하는 단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반계수록(磻溪隨錄)』
『목민심서(牧民心書)』
『만기요람(萬機要覽)』

단행본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고려대학교출판국, 1980)
김태영, 『조선전기토지제도사연구』(지식산업사, 198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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