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흥성(興城, 興德). 자는 겸선(兼善). 호는 사촌(沙村). 남원 출생.
아버지는 정랑 장건(張健)이며, 어머니는 양공건(楊公健)의 딸이다. 종부(從父)인 장급(張伋)에게 입양됐다.
재질이 총명하여 5, 6세에 벌써 글을 해독할 줄 알았다고 전한다. 특별한 스승이 없이 가정의 교육을 통해 성장했다.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밝았고 문장에 있어서는 당송팔가(唐宋八家 : 한유·유종원·구양수·소순·소식·소철·증공·왕안석)을 모범으로 삼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일가를 이루었다.
바른 생활과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던 노진(盧禛)을 비롯하여 김복흥(金復興)·양사형(楊士衡)·최상중(崔尙重) 등과 돈독한 관계를 쌓았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9년(선조 22) 43세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서관저작을 거쳐 1593년(선조 26) 공주제독관을 지냈으며 얼마 뒤에 승문원박사를 역임했다. 이어 공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도사로 부임했다가 1602년(선조 35)에는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금구현령을 자청했다. 이듬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작품으로 「정부사(征婦詞)」·「상사곡(相思曲)」·「춘규원(春閨怨)」·「의고가사(擬古歌詞)」 등을 남겨 후세에 문명을 떨치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지은 것이 많다. 특히, 1612년에 쓴 「효퇴계선생도산육곡작강호연군가(效退溪先生陶山六曲作江湖戀君歌)」는 이황(李滉)을 사모하여 그의 「도산육곡(陶山六曲)」을 본떠 국한문으로 지은 가사인데, 애군우국을 노래한 「전육곡」과 존주척육(尊朱斥陸)을 노래한 「후육곡」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려는 마음과 주자학을 숭상하는 사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저서로 『사촌집(沙村集)』이 있다.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에 제향됐다.